《인간 원죄인 욕망. 그 욕망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파멸. ‘한 영화 두 소리’의 부부 영화평론가 심영섭씨와 남완석 교수(우석대 연극영화학부)가 불륜으로 얽힌 한 남자와 세 여자의 이야기 ‘주홍글씨’를 이번 회 토론거리로 삼았다. 아내와 정부, 상상 속의 여인까지 욕망의 황금분할로 모든 것을 가지려 했던 남자와 ‘사랑’이란 이름 아래 비밀을 숨긴 여자들. 그들을 통해 인간 심연을 들여다보려 했던 감독의 전략은 성공한 것일까.》
● 차 트렁크, 현대의 고해소
▽심영섭=이 영화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건 불륜관계의 두 남녀, 가희(이은주)와 기훈(한석규)이 ‘자동차 트렁크 안에 갇힌다’는 설정이었어. 원작소설 ‘거울에 대한 명상’을 쓴 작가 김영하의 아이디어에 찬사를 던지고 싶은 거지. 뛰어난 이미지의 전용이야. 영화에서는 밀폐된 공간인 차 트렁크를 현대의 ‘고해소(告解所)’로 만들어버려. 그런데 왜 이 핵심 이미지로 영화를 꾸려 나갈 생각을 안 했을까, 변혁 감독은?
▽남완석=글쎄…. 난 오히려 트렁크에 갇혀서 두 사람이 파국으로 가는 상황이 의외의 결말이다 싶었어. 영화의 앞부분은 삼각관계처럼 진행되다가 갑자기 뒷부분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져버려. 사진관 살인 사건과 트렁크 이야기가 서로 붙지 않아.
▽심=2개의 원작소설을 하나로 합쳐서 그렇겠지. 난 그래서 이 영화가 아예 트렁크 신부터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봤어. 플래시백(회상장면 기법)으로 얼마든지 이야기를 밀도 있게 풀어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박찬욱 감독이라면 틀림없이 그렇게 했을 텐데.
● 한석규, 대박주의에 함몰?
▽심=사실 이 영화에서 트렁크 신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이은주 한석규 두 배우의 화학작용에서 나와. 영화에서 내내 못마땅했던 건 불륜의 결과나 응징은 있는데,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거였거든. 불륜이란 매혹과 불안, 열정과 좌절 사이를 곡예하는 감정이야. 그런데 이 영화에는 그런 미묘한 감정이 없어. 그 ‘과정의 결핍’을 메워주는 게 바로 이은주의 연기력이라고 생각해.
▽남=두 사람의 연기가 빼어났다는 데는 동의해. 하지만 한석규의 경우는 연기가 자연스럽기보다는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쓰는 것으로 다가왔어. 한석규에 대한 내 느낌은 ‘선이 가늘다’는 건데, 배우로서 한석규는 뭔가 동물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더라고.
▽심=한석규에 관한 나의 정의는 ‘배신당함의 왕자’라는 거야. 그는 인생이든, 운명이든, 연인이든 늘 배신당해. 그러다보니 연기가 전형화되는 것 같아.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배신이란 테마가 없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그다운 연기력을 선보여.
▽남=나는 한석규가 출연작을 고를 때 너무 대작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어. 한마디로 ‘센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야심. 근본적으로 식물성인 사람이 동물적인 비열함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불협화음은 거기서 출발한다고 봐. 그리고 4명의 인물 중 사진관 여주인을 맡았던 성현아나 기훈의 아내 수현 역의 엄지원은 캐릭터와 배우 역량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확연했어. 그래서 관객이 스토리 전개에 더 설득되지 않은 것 같아. 예컨대 성현아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여주인공 선화를 맡았을 때 보여줬던 섹시함은 증발하고 대단히 평면적으로 느껴져.
▽심=영화에서 성현아가 맡은 경희 역은 속이 안 보이는 인물이어야 해. ‘여자는…’의 선화와는 정반대의 인물이지. 기훈이 가희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여자를 두고도 수현을 아내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관객에게 설득이 안 돼.
▽남=기훈이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단지 현모양처라는 설정은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판타지가 개입했기 때문이 아닐까. 놀 때는 섹시한 여자와, 결혼할 때는 백지 같은 여자와 한다는 편견.
▽심=그래.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깃거리인 동성애에서도 남성중심주의는 노골적으로 드러나. 나는 동성애 정사장면에서 되게 웃었어. 사랑을 나누는 두 여자의 접촉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남성적이기 때문이야.
● 변혁 감독의 의미 있는 실험
▽남=관객들은 무심히 넘어갈 수 있지만 이 영화에는 아주 공들여 찍은 장면이 반복되지. 가희와 한 침대에 들었던 기훈이 아내인 수현 옆에서 깨어나는 장면 같은 것. 또 가희와의 정사 후 기훈이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가희 집이 아니라 자기 집이라는 식이지. 관객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편집 기법, 이 속임수는 영화의 주제와도 아주 관계가 깊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영상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 같아.
▽심=감독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였던 것은 관객하고 게임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남=그래. 변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쳐주고 싶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실망한 점도 없지 않아. 데뷔작인 ‘인터뷰’에서 변 감독은 ‘매체 자체를 사유한다’는, 한국영화에서 아주 보기 드문 지평을 열었지. 두 번째 장편인 ‘주홍글씨’에서 변 감독은 한국적 누아르를 시도했어. 그런데 화면에서 너무 예쁜 것, 귀티 나는 것들을 좇다보니 심리 누아르가 그만 화사해져버렸어.
▽심=난 이 영화의 한 컷, 한 컷이 갖고 있는 폭발력이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다고 봐. 컷을 너무 잘라. 영화를 보면 배우들의 행동은 있지만 동선은 없어. 그래서 공간 표현이 대단히 평면적이지. 화면이 예쁘긴 하지만 동선이 주는 긴장감을 살리지 못한 거야.
▽남=영화 속의 중요한 테마인 성(聖)과 속(俗)의 문제도 그래. 마리아상이 살해의 도구로 쓰이고, 죄의 씨앗이자 성스러운 탄생인 ‘잉태’와 ‘낙태’가 중요한 모티브로 던져지지만 그게 합일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어떤 지점이 없어.
▽심=나는 감독이 추구한 게 럭셔리 누아르였다고 생각해. 대단히 세련되고 우아한 누아르. 패착은 거기서 비롯됐어. 누아르는 기본적으로 건조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사랑이란 축축한 멜로에 집착하거든. 난 누아르를 찍기에는 변 감독이 너무 착하거나, 아니면 머리로 영화를 찍은 게 아닌가 싶어. 나도 영화 보면서 궁금해지던데 말야. 당신의 아내로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어.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기도 하고. “당신의 주홍글씨는 과연 뭐지?”
정리=정은령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