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탕현(탕縣)이 항복해 오기에 이대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팽성에 들게 되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틀린 일 같소. 내일 날이 새는 대로 대군을 풀어 성을 깨뜨린 뒤 바로 팽성으로 밀고 들도록 합시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왕은 알 수 없는 승운을 타고 힘든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이었다. 날이 저물자마자 소성(蕭城) 안에서 글을 매단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그 화살을 주운 병사가 그걸 한왕에게 갖다 바쳤다.
화살에 매단 흰 비단에는 대략 그런 뜻의 잔글씨가 쓰여 있었다. 한왕이 기뻐하며 그대로 따르려하자 장량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라도 적의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때 함께 있던 진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성안의 군민은 기껏해야 5만이고 우리 군사는 50만이 넘습니다. 무슨 계략으로 5만이 50만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모두 듣고 보니 진평의 말이 옳았다. 어둠 속에 두 갈래 군사를 내어 동문과 북문 가까이 숨어있게 하고 삼경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삼경이 되자 정말로 두 성루에서 불길이 오르고 이어 성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한군(漢軍)이 함성과 함께 열어젖혀진 성문으로 뛰어들었다. 제나라와 팽성 쪽으로 나 있어 싸움에 단련된 초나라 군사들보다 소현 백성들이 더 많이 지키던 북문과 동문이었다.
그러잖아도 무슨 높고 거친 파도처럼 성을 에워싸고 있는 한나라 대군에 은근히 겁을 먹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성문이 두 곳이나 열렸다는 소리를 듣자 벌써 싸울 기력을 잃고 말았다.
거기다가 한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성문들이 바로 자기들이 달아날 길임을 알게 되자 그대로 창칼을 내던지고 털썩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가 팽성으로 달아난 것은 소성을 맡아 지키던 패왕의 족제(族弟)와 그 부장(部將) 몇 명뿐이었다.
“바로 팽성으로 가자. 오늘을 넘기지 말라!”
날이 샐 무렵 소성을 온전히 거둬들인 한왕이 갑자기 그렇게 서둘렀다. 한신이 가만히 말렸다.
“아무리 힘들 것 없는 싸움이라지만 밤을 새워 군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저들에게 밥을 지어먹이고 한나절 쉬게 한 뒤 가는 게 좋겠습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