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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기자의 감성크로키]복도식 아파트 ‘풍경 아트’

입력 | 2004-11-11 16:14:00


어릴 적 옆에 끼고 살았던 세계 아동 화집을 떠올리게 된 것은 순전히 복도식 아파트 덕분이다.

들녘의 허수아비나 우주 비행선을 그린 한국 어린이들과 달리 유럽 어린이들의 그림에는 유독 ‘단추’라는 제목이 많이 붙어 있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단편 영화처럼 칸칸이 메운 그림들의 제목이 왜 단추일까 참 많이 의아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옷에 다는 단추가 아니라, 짧은 생각(短推)이란 뜻의 한자어였던 것 같다.

복도식 아파트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에서 바라보는 건너편 아파트는 차라리 하나의 뉴미디어 아트이다.

텔레비전을 갤러리 바닥에 쌓아 올려 설치하고 모니터를 통해 정치적인 것, 자연 풍경, 핵폭발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이미지를 빗발치듯 영사했던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닮았다.

효과적인 관람을 위해 관객은 어둠이 깔린 밤 시간, 아파트 복도라는 객석에 서본다. 조명 효과가 더욱 돋보인다.

지금 바라보는 건너편 아파트의 베란다는 가로 7개, 세로 14개의 베란다가 질서정연하게 텔레비전 모니터처럼, 성냥갑처럼 쌓여 있다.

노란색 할로겐램프를 켠 집, 슬프도록 푸르스름한 형광등을 켠 집, 벽면에 동양 산수화 액자를 건 집, 화초 옆에 1인용 가죽 소파를 두고 홀로 앉아 있는 중년 부인…. 블라인드와 커튼 사이로 슬쩍 내비치는 일상 풍경은 망원경 없이도 보인다. 텔레비전 모니터 같은 베란다 속 진짜 텔레비전 속에서는 아홉시 뉴스 남자 앵커 얼굴도 내비친다.

규칙적 배열의 공간 안에 담겨 있는 군상은 형형색색 퍼즐 게임 같다. 14에 7을 곱한 98개 직사각형 공간 속에는 각기 다른 속도, 내러티브, 이미지, 음악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같은 곳, 조지 윈스턴의 ‘럴러바이’ 같은 곳이 있을 것이다.

아파트 베란다의 밤 풍경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누구나 영상의 주체 또는 대상이 될 수 있는 ‘멀티 오브제’ 시대에 일상은 디지털 언어로, 시적 언어로 변환된다.

시각의 렌즈를 줌 인(zoom in)해 아파트를 관찰했다면, 이번엔 줌 아웃(zoom out)한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 렌즈를 지휘하는 것은 역시 감성이 담긴 눈이다. 우리 마음속의 연민이, 사랑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관찰을 만든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