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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영화파일]‘우작’의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

입력 | 2004-11-11 17:04:00

누구와도 소통할 수없는 현대인의 고독을 담아낸 터키 영화 '우작' -사진제공 코엑스아트홀


국내 어느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지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저주받은 수작을 보고 있으면 몇 가지 점에서 놀라게 된다.

스크린 속 터키 이스탄불의 풍경은 어쩌면 이렇게 우리들 사는 모습과 비슷할까 싶다. 도시가 현대화된 정도도 그렇고 대기오염도 여기 못지않은 것 같다. 또 뚜렷한 빈부격차에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무표정한 얼굴들, 떠도는 실업자들도 그렇다.

사람들만 슬쩍 바꿔 놓으면 ‘우작(Uzak)’은 영락없는 한국 얘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닮아 있는 것, 그래서 더 섬뜩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 그 황량함이다. 비루하고 남루하며 이기적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마음.

이 작품은 따뜻함, 배려, 사랑 같은 정서에서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지친 사람들의 얘기를 다룬 영화다. 오죽하면 제목을 ‘우작’, 곧 터키어로 ‘멀리’라고 했을까.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

솔직히 말해 지난해 칸 영화제는 이 작품에 과도한 평가를 해 준 것이 아닐까도 싶다. 지난해 칸은 심사위원대상(올해 ‘올드보이’가 받았던 그 상)과 남우주연상을 이 작품에 수여했다. 왜 그랬을까. 그러기에 언뜻 이 영화는 지나치게 ‘로컬리티(지역성)’가 강한 것처럼 느껴진다. 터키 사람들이 지금 처해 있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을 만큼 보편적인 얘기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칸이 주목한 것은 특정한 환경 혹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칸의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의 내면을 중시했을 것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이 영화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 이게 터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얘기이며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고독과 외로움, 상처와 아픔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중년의 사진작가 마흐무트는 아내와 헤어진 뒤 섹스 파트너인 정부(情婦)와 외로움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지루하고 공허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을 잃고 고향에서 올라온 사촌동생 유스프가 찾아오면서 마흐무트의 일상은 방해를 받는다. 점점 짐이 돼가는 유스프. 정부와의 혼외정사도 유스프 때문에 결국 만족스럽지 않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청년 유스프는 찾으라는 일자리는 찾지 않고 도시 여자들의 섹시한 다리에만 온통 마음이 가 있다. 마흐무트는 결국 유스프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그를 시계도둑으로까지 몰아세운다. 유스프는 어느 날 마흐무트에게 인사도 없이 집을 나가 버린다.

마흐무트는 말과 행동과 자신이 찍어 대는 사진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이다. 어려운 경제여건에 놓여 있는 지금의 터키에서 마흐무트는 유스프와 달리 시골에서 올라와 자수성가한 사람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잃었다.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다. 마흐무트는 물질적으로 성공했지만 대신 절대적인 이기심과 그로 인한 외로움을 얻었다. 영화 내내 마흐무트는 유스프의 등 뒤에서 그를 쥐새끼라고 욕해댄다. 얹혀사는 주제에 거실에서 담배를 피워 댄다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마흐무트는 자신이 왜 아내를 잃었는지, 정부마저 왜 자기를 떠났는지, 무엇보다 왜 자기가 공허하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는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세상 어디를 가나 만날 수 있는 먹물들, 곧 지식인들의 표상이 바로 이 영화 속 마흐무트의 모습이다.

‘우작’은 신기하게도 홍상수 영화와 닮은 점이 많다. 홍상수 영화가 터키 풍경으로 리메이크된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만큼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 역시 일상의 비루함과 지독하게 삭막하고 쓸쓸한 현대인들의 내면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다. 홍상수와 누리 빌게 세일란의 차이라면 그 속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는 방식, 스타일이다. ‘우작’은 영화 내내 우중충하고 어두운 항구도시 이스탄불의 풍경을 롱테이크(길게 찍기)로 담아낸다. 그 컷 하나하나는 바로 우리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5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아트홀에서 상영 중. 15세 이상 관람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