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는 시들을 새긴 도자기 앞에 앉은 시인 신경림(왼쪽)씨와 도예가 김용문씨. 신씨는 “캄캄한 그 시절 참 열심히들 일했다”며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 무렵에는 사무실이 없어 송기원(소설가)이가 서류들을 가방에 몽땅 넣어다녔는데 한번은 물에 빠져 다 날아갈 뻔 했다”고 회고했다. 양평=이종승기자
민족문학작가회의(작가회의)가 주관하는 ‘100년 동안의 시’ 도자기전이 17∼23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열린다. 18일 창립 30주년을 맞는 작가회의가 마련한 기념행사다. 작가회의가 뽑은 작고 시인 11명, 생존 시인 10명의 시를 도예가 김용문씨(49) 등이 도자기에 새겨 선보이는 것이다.
김씨는 지난해 말 서울 인사동 술집 ‘시인학교’에서 우연히 원로시인 신경림씨(70)를 만나 도자기에 새긴 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격려를 받은 뒤 올해 4월부터 시작해 7개월 동안 작업을 해왔다.
11일 신씨와 함께 경기 양평군 강상면 교평리에 있는 전원스튜디오 ‘아이’에 도착했을 때 김씨가 방금 전까지 도자기를 굽던 가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신씨는 전시를 기다리는 21개의 도자기를 보고 “장관이네”라며 흐뭇해했다. 그는 자신의 시 ‘목계장터’가 새겨진 도자기 앞에서 시를 쓰게 된 동기를 밝히며 김지하 시인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생긴 게 1974년이지요. 이듬해 김지하 시인이 출감했다가 한 달 만에 다시 투옥되었어요. 김 시인의 옥중수기가 동아일보에 연재되자 군부정권이 형 집행정지 조치를 취소해버린 거예요. 캄캄한 시절이었어요. 김 시인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사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어요. 저는 그 무렵 대학에서 해직된 염무웅씨와 함께 원주에 사시는 김 시인의 부모님을 위로하러 갔다가 힘없이 돌아 나왔어요. 김 시인 면회도 안 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아무도 더는/오르지 않는 저 빈 산//해와 바람이/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아아 빈 산/이제는 우리가 죽어/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빈 산//너무 길어라/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파라/지금은 숨어/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불꽃일 줄도 몰라라’.
김 시인의 시 ‘빈 산’의 일부다. 이 시 역시 이번에 도자기에 새겨졌다.
신씨는 “하염없이 길을 떠나 충북 충주시 엄정면 목계장터에 이르렀을 때 슬픔처럼 시가 솟아나더라”고 말했다. 푸른 강가에는 나룻배가 오가는데 봄볕마저 서러운 어느 하루였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목계장터’ 중에서) 신씨는 “갑자기 고은의 시 ‘친구들의 백발’이 생각난다”며 “고은 백낙청 박태순부터 세상 떠난 이문구, 젊었던 송기원까지 (작가회의 일을) 참 열심히 했지”라며 아득한 눈길을 보냈다. “그때(74년) 내가 마흔인데 지금 칠십이니…그래도 작가회의가 이제 서른 살이 됐으니…한창 때지.”
김씨는 “도자기 하나 구울 때 서른 시간씩 가마를 지폈다”며 “불 속에 달궈진 도자기들이 고난으로 달궈진 시들을 수천년 동안 안고 갔으면 좋겠다”고 소원했다.
양평=권기태기자 kkt@donga.com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30주년 다양한 행사▼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들을 잇달아 갖는다.
13, 14일에는 강원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전국문학인대회를 개최한다. 민족문학 세미나와 시 낭송, 통일 굿 등이 마련된다. 창립일인 18일에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본행사를 갖고 창립연도인 1974년생 작가들이 선언문을 채택한다. 17∼23일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도자기전 외에도 사진·자료전 ‘문학의 길, 역사의 길’, 시판화전 ‘21세기를 노래하는 새로운 목소리들’을 갖는다.
24일∼12월 8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시실에서는 고 김남주 시인 10주기를 추모하는 ‘사랑과 전투의 시인 김남주전’이 마련된다. 12월 중에는 문인 애장품 바자, 친선 산행과 바둑대회가 잇따른다. 02-313-1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