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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청소년 역사강좌]제7강 ‘해방과 분단국가의 형성’

입력 | 2004-11-15 19:01:00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열린 청소년 역사강좌 제7강 ‘해방과 분단국가의 형성’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청중. 강연이 끝나고 1시간 넘게 이어진 질의응답 순서에도 많은 사람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신원건기자


《“요즘도 진보와 보수 논쟁으로 어지럽지만 해방 이후 3년간은 지금보다도 더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13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열린 ‘2004 청소년 역사강좌’ 제7강에는 이완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가 강사로 나섰다. ‘해방과 분단국가의 형성, 1945∼1948년’이라는 제목의 이날 강연에서 이 교수는 “한국의 분단은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 시도로 인한 국제 상황적 요인 때문에 시작됐지만, 그 이전에 좌우익간의 이데올로기 대립도 작용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

●해방인가 광복인가

한국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르고 있다. 광복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해방이 됐지만 완전한 광복이 되지는 못했다. 즉 일본이라는 외세의 지배에서는 해방됐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외세인 미국과 소련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38선으로 분할 점령됐고, 1948년 남북 각각의 단독 정부가 수립됐으며, 1950년 6·25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됐다. 싸워서 얻은 해방이 아니고 연합국 승전의 결과였기 때문에 불완전한 해방이었던 것이다.

●미군-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미군은 1945년 9월 2일 서울 상공에 조선 미 육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 명의의 포고문을 뿌린다. 이 포고문에는 ‘위반한 자는 처벌당할 것이다’라는 고압적인 문장이 담겨 있다. 반면 같은 해 8월 15일 발효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련의 ‘치스치아코프의 포고문’은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로 끝맺고 있어 우호적인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논리를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로 인용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소련군의 포고는 자신들이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간교한 수사를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해 10월 12일자 북조선 주둔 소련군 25군사령관 성명서는 허가·금지 등의 표현을 쓴 고압적인 내용이다. 미소(美蘇)는 모두 점령군으로 진주했다고 봐야 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와 탁치논쟁

한반도 분단은 1945년 7월 말∼8월 초 미국에 의해 북위 38도선이 일방적으로 획정되고 소련이 이에 동의하면서 국토분단의 형태로 시작됐다. 외세의 힘이 최초의 분단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탁치논쟁은 분단에 내부적 요소를 끌어들였다. 1945년 12월 ‘한반도의 독립을 위해 미소영중 4개국의 신탁통치가 5년간 실시된다’는 내용의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발표되자 백범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은 반탁운동을 주도했다. 조선공산당은 반탁을 지지하다가 소련의 종용 때문에 찬탁으로 돌아섰다. 탁치문제가 매개되면서 좌우대립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골육상쟁’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조선공산당은 신탁을 반대하는 민족감정과 융합하는 데 실패하고 지지기반을 상실했다.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겨 정부를 수립시킨 후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제공해 주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는 한국에 관한 결의문을 48 대 6(기권1)으로 채택했다. 이 결의문은 “유엔임시위원단이 관찰하고 협의할 수 있었고 전체 한국인의 대부분이 살고 있는 한국의 한 부분 위에 효과적인 통치와 관할권을 갖는 합법적 정부가 수립됐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한국에 있는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고 언급돼 있다. 북한 정부는 이러한 유보적인 승인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한민국(남한)은 정통성 면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

:이완범 교수는:

한국분단사를 전공한 이완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43·정치학·사진)는 1983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미국 조지타운대와 하버드대 교환교수를 거쳤다. 미국의 한국현대사 자료 수집에 애썼다. 주요 저서로 ‘한국전쟁’(백산서당·2000년), ‘삼팔선 획정의 진실’(지식산업사·2001년) 등이 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

▼제7강서 쏟아진 질문들▼

13일 열린 역사강좌 제7강에는 250여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이들은 1945∼48년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질의응답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지환군(12·백마초등 6년)은 “6·25전쟁은 계획적으로 일어났다고 들었다. 분단도 계획적인 것이었나”라고 물었다. 강사인 이완범 교수는 “38선은 계획적인 공모에 의한 산물이 아니다. 하지만 우발적인 것으로 보기도 힘들다. 미국과 소련의 묵시적인 세력분할에 의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대륙과 바다를 잇는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가 좋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를 외교적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장석중씨(64·서울 강남구 삼성동)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돼 있다. 하지만 유엔은 남한이 정통성을 가진다고 했다. 북한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엔에 가입했나. 또 동시 가입이 통일에 유리한가”라고 물었다. 이 교수는 “유엔은 미국 주도로 생긴 친서방 기구였다. 냉전체제하에서 유엔은 국제기구일 뿐 국가 승인에서 대표성을 가진 기구는 아니었다. 반면 소련을 비롯한 많은 국가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통일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다. 이전에는 북한이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교류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긴 것이다. 개방의 전기를 마련해 줬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김한석씨(29·서울 서초구 양재동)는 “소련에 비해 미군정의 통치방식이 매우 비합리적이지 않았나”라고 질문했다. 이 교수는 “소련은 김일성을 내세우는 등 비교적 북한 통치에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소련군이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나쁜 행태를 보였다. 친구는 잘한 것만 보이고 적은 나쁜 점만 보이듯이 미국에 적대감정이 있으면 나쁜 면만 보이는 것이다”고 말했다.

▼염한균-동휘 父子 즉석토론▼

염한균씨(왼쪽)가 함께 강연을 들은 아들 동휘군과 대화를 나눴다.-신원건기자

“개혁과 보수 논쟁이 끊이지 않고 시절이 어수선하네요. 역사를 배우면 현 상황을 바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강의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처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왔어요.”

역사강좌 제7강 강연이 끝난 후 염한균씨(47·자영업)가 아들 동휘군(14·서울 당곡중 2학년)과 부자 대화를 나눴다. 강의 참석이 세 번째라는 염씨는 “1970년대 유신시절 학교에서 배운 국사와는 다른 내용이 많다”고 말했다.

“독립군이 중추적 역할을 한 걸로 알았던 해방이 단순히 연합국의 승리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충격이 컸어요. 몰랐던 부분을 배우면서 그에 관한 배경 설명까지 들으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네요.”

동휘군은 “어려운 내용이 많지만 학교수업보다 더 자세하고 좋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태어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며 웃었다.

염씨는 “오늘 아들을 데려오려고 마음먹은 건 젊은 학생들의 질문이 날카로운 걸 보고 식견을 넓혀주고 싶어서였다”며 “처음에는 오지 않으려고 했던 아들이 강의를 열심히 들어주니까 고맙다”고 말했다.

동휘군은 “이런 강의는 처음이라 긴장도 했는데 교수님 강의를 들으니 재미있는 면도 많다”며 “앞으로도 계속 오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분단된 것은 결국 힘이 약했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요. 힘으로 선진국에 뒤지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으로라도 앞서야 할 것 같네요. 저는 대학에 입학하면 정치외교학을 전공해서 정치를 하고 싶어요.”

염씨는 “고3인 딸도 데리고 오고 싶었는데 수능시험이 코앞에 닥쳐 함께 못 온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번 주 토요 역사강좌 안내(제8강)▼

▽일시=20일 오후 3∼4시반

▽장소=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

▽주제 및 강사=‘전후 1950년대 다시 보기’(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

▽제8강의 이해를 돕는 책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역사문제연구소 편·역사비평사·1998년)

△해방 후 1950년대의 경제(이대근·삼성경제연구소·2002년)

△1950년대 서울의 자본가(공제욱 외·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1998년)

■강좌에 관한 사항은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02-920-7089)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동아닷컴(www.donga.com)'2004 청소년 역사강좌'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