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신 암행어사’. 한국과 일본에서 총 200만 권 이상 팔린 윤인완 양경일 콤비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사진제공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몽환적인 것과 몽롱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말은 26일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개봉되는 애니메이션 ‘신 암행어사’에 그대로 적용된다.
윤인완 원작, 양경일 그림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해 25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이 86분짜리 애니메이션은 국내 만화를 원작으로 한 최초의 한일합작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란 점에 의미가 있다. 그간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줄거리와 원화를 일본에서 만들고 한국은 동화(動畵) 제작을 ‘하청’ 받는 종속적 시스템이 대부분이었다.
‘신 암행어사’는 원작의 캐릭터와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원작 속 유머를 완전히 걷어내고 수묵화의 번짐 기법을 배경처리에 사용함으로써 동양적 이미지와 함께 음울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함께 노렸다.
부패관리를 엄벌하는 암행어사 문수는 모국인 쥬신이 패망한 뒤에도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한다. 그는 암행어사의 꿈을 접고 방황하는 몽룡을 만나지만, 몽룡은 사막의 식인괴물에게 목숨을 잃는다. 몽룡의 헤어밴드를 한 채 몽룡의 고향으로 간 문수는 몽룡의 애인 춘향을 만난다. 살기어린 검술을 구사하는 춘향은 문수를 호위하는 여검사 산도가 되어 문수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시체도 살려내는 기적의 명의 유의태를 만난 문수 일행은 수상쩍은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신 암행어사’는 익히 알려진 조선시대 실존(혹은 소설 속) 인물들을 캐릭터로 끌어온 뒤 그 고정 이미지를 휙 비틀어 버리는 식으로 도발한다. 암행어사 ‘박문수’에서 온 주인공 ‘문수’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반면 폭압 권력에 복종하는 백성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절개의 대명사인 ‘춘향’은 붕대와 가죽 끈으로만 이뤄진 아슬아슬한 의상을 입은 채 상대의 머리를 댕강 날리는 차갑고 살벌한 킬러로 그려진다. 명의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를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교주처럼 묘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영화는 원작이 갖는 ‘국적불명+시대불명’의 독특한 매력을 가일층 강화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무드를 조성하기 위해 이야기가 갖는 속도감 자체를 의도적으로 없애버린 이 애니메이션은 순간의 장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탓에 이야기는 찢어지고 부분과 부분은 점점이 떠돈다.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액션보다 멋진 체하는 대사(예를 들어 “진실이란 건 중요하지 않아. 너만 편안할 수 있다면”과 같은)에 기대어 의미를 만들어 낸다. 이는 완결된 이야기 구조와 관통하는 긴장을 상실한 이 애니메이션이 피할 수 없는 종착역이다.
성우들의 목소리도 의미과잉과 해석과잉을 드러낸다. 모든 캐릭터는 그 선악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제히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를 내는데, 이런 천상(天上)의 음성은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빚어내는 긴장감과 리얼리티를 반감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영화 중반 가수 보아가 일본어로 부른 주제가를 놓치지 말 것. 15세 이상 관람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