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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루게릭 사투 사진가 김영갑씨와 함께한 주말

입력 | 2004-11-18 16:15:00

김영갑씨는 “들판은 시련을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나는 들판을 친구 삼아 비극과 고통을 넘어선다“고 했다. 위 사진은 그의 사진집 ‘은은한 황홀’에 실린 제주도의 들판 풍경. -동아일보 자료사진


어느 성직자가 말했다.

“숟가락질 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신에게 감사하라”고.

그러나 그는 숟가락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다.

김영갑(金永甲·47).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어온 독신의 사진작가.

13일 만난 김영갑씨의 모습.

지난 13일, 3년 만에 제주도를 찾아 다시 만난 그는 ‘미라’였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루게릭병’으로 불리는, 10만명 가운데 1, 2명에게 발생한다는 희귀병. 근육이 촛물처럼 녹아 몸에서 빠져나가 70kg을 넘던 몸무게가 이제 40kg도 안 된다.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먹는 어린 새처럼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며 물 같은 음식을 힘겹게 삼킨다.

그래도 그는 감사한다고 했다. 호흡은 할 수 있으므로….

그는 숨쉬는 동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시회를 하기로 했다. 이날 자신을 찾은 지인 몇 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내년 1월 10일부터 15일까지, 장소는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층 서울갤러리.

○ 사진가의 영혼이 깃든 사진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사진을 보며 “사진은 사진가의 영혼이 만든다”고 말했다.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

카파는 종군기자의 대명사, 전설적인 포토 저널리스트다. 그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쓰러지는 병사(Falling Soldier)’는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 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병사 곁에 있다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좀 더 가까이 가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는 1954년 41세에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독립전쟁)을 취재하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

카파는 전쟁의 진실을 찍었고 김영갑은 자연의 황홀을 찍었다. 그러나 둘은 영혼으로 사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사진과 목숨을 맞바꿨다는 점에서 같다. 김영갑은 말했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김영갑은 외로웠다. 어렸을 적 부모를 잃고 방황하던 그에게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형이 사다 준 카메라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어느 날 사진을 찍으러 제주도에 들렀다. 그는 섬의 외로움과 평화가 좋았다. 1985년 나이 서른을 앞두고 서울을 떠나 제주도에 정착했다. 그 무렵 제주도 풍경을 찍은 사진 몇 장으로 사진전람회에 입선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다른 사진가들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 감동의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며칠 동안 작업을 중단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다. 당장 전화부터 없애자. 처음에 그랬듯이 외로워지자. 외로워야 전념할 수 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으면 그 외로움을 잊기 위해 온종일 들판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감동이 느껴지는 순간 사진을 찍었다.

그에게 사진은 기다림이었다.

“사진은 일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승부를 거는 처절한 싸움. 한번 실수하면 그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황홀함은 삽시간에 끝난다.”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렬한 그 순간을 위해 수없이 찾아가고 한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누구도 보여준 적 없는 아름다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신비로움을 찍었다.

그는 작품을 팔지 않았다. 사진 청탁도 거절했다. 가난은 필연이었다.

눈보라 치는 한겨울 북제주군 대천동 산간 마을에 살면서 난방이라고는 전기장판 한 개. 그나마도 한밤중에만 사용했다. 라면마저 여의치 않으면 냉수 한 사발로 끼니를 대신했다.

먹을 것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필름과 인화지가 떨어지는 것이다. 굶주림은 작업으로 잊을 수 있지만 필름이 없어 작업을 못하는 서글픔은 참지 못한다. 그럴 때는 카메라 대신 눈으로 찍고 마음으로 인화를 했다.

○ 몸속에 갇힌 영혼

그러기를 십수년. 1999년 어느 날 제주도청 전시회를 끝낸 뒤 노래를 부르려 했다.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졌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시도했지만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숨이 찼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허리가 아팠고 뒷목이 당겼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다리가 마비돼 왔다.

2001년 말 원인을 알게 됐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의사에게서 루게릭병이라는 말을 들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병. 원인불명의 불치병이라고 했다. 눈만 뜨면 카메라를 메고 다녔던, 지독하게 가난한 사진가의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한 지인은 “천국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훔쳐보아서, 자연의 신비를 누설해서 신이 질투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병세는 더 심해졌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 일어설 수 없어서 몇 시간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반듯하게 누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야 겨우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정신은 말짱했다. 식물인간의 정반대였다. 영혼이 살 속에 갇혀서 죽음을 기다린다.

2년 가까이 치료를 위해 이곳저곳 다녔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작년 봄 그는 결심했다.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로 했다.

“대책이 없을 때에는 무대책이 최선일지 모른다. 그냥 아픔을 끌어안고 세월에 맡기자. 세월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내줄 테니까….”

그 사이 주변에서 도와준 돈으로 치료 대신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를 개조해 하얀 갤러리를 만들었다.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이제 사진을 찍을 수도 없으니 떠나기 전에 실컷 걸어두고 보고 싶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수십개의 라면상자에 가득 채워진 필름들을 다 불살라 없애겠다고 했다. 그것들을 자신만큼 사랑하고 아껴줄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제주=이수형기자 so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