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북한 핵 관련 발언은 20일 칠레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 발언이 북한 핵문제의 돌파구를 찾는 묘수가 될지, 아니면 두 나라의 대북 공조를 휘청거리게 할 악수(惡手)가 될지는 정상회담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정부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성공적 한미정상회담을 위한 치밀한 각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여야간 논란이 여전히 뜨겁고,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청와대가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소외론마저 제기됐다.
▽공동발표문?=한미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중에 이뤄지는 것이어서 양국 정상의 공동기자회견이나 공동성명, 공동 언론 발표문 같은 것을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을 수행 중인 한 핵심관계자는 18일 “현재 공동발표문 같은 것을 사전조율하고 있지 않다”며 “회담 후 양측 배석자가 적당한 협의를 거쳐 대언론 브리핑을 하는 형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는 노 대통령 발언 이후 한미 양국의 대북 시각차가 분명히 드러난 만큼 ‘한미간 대북 공조는 이상 없다’는 원론적 수준의 발표문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양측의 브리핑 내용에 차이가 있을 경우 불필요한 오해나 억측을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19일 칠레에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만나 정상회담의 의제와 발표 형식을 최종 조율할 예정이다.
▽정상회담용 ‘예방주사’=노 대통령은 왜 한미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 남미 순방의 중간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처럼 민감한 발언을 했을까. 한 정부 관계자는 “발언의 형식과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즉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 중의 비공개 논의 대신 공개 강연이란 형식을 택하고, 그 시기도 정상회담 이전으로 한 것은 치밀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것.
다른 관계자도 “노 대통령이 그 발언을 정상회담에서 처음 한다면 부시 대통령은 2001년 3월 당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 때처럼 싸늘한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며 “이번에는 예방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그때와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예방주사’를 맞았기 때문에 20일 회담에서 한미간 인식차가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열린우리당의 소외감=여당 내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당이 사전에 알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대통령이 해외순방길에 오르기 전에 어떤 얘기를 할지 청와대에서 알려줬어야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발언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해 “대통령이 또 말실수를 한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의원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이날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석한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여야간 설전이 계속됐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미국을 자극하는 위험한 발언’이라고 비판했으나 김 실장은 ‘자주적 입장의 표명’이란 관점에서 반박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