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씨가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천하 쟁투 서사시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가 19일부터 권(卷)5 ‘밀물과 썰물’편을 시작했다. 항우가 해하(垓下)에서 비장한 자결을 하는 권(卷)8을 대미(大尾)로 생각하고 있는 작가는 “이로써 ‘큰 바람…’의 절반을 넘어선 셈”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집필실인 경기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부악문원을 찾아갔을 때 그는 완벽하게 ‘큰 바람…’에 몰입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권5 ‘밀물과 썰물’의 첫 장인 ‘전신(戰神)’이 잠시 침체에 빠졌나 싶었던 항우의, 거세다 못해 화려하기까지 한 무력(武力)을 다룰 예정이어서 더욱 그런 듯했다.
“패왕 항우는 자기 근거지인 팽성(彭城)을 유방에게 빼앗기게 되자 정예 3만을 이끌고 56만 유방 군사를 두 차례에 걸쳐 쓸어 버립니다. 역사는 승자 위주의 기록이라 (훗날 결국 유방에게 패배하는) 항우의 이런 무공은 정사(正史)에선 서너 줄 나올 뿐입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오히려 유방에 대해선 냉정하게 써 나갔지만 항우에 대해선 부러 미화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동받은 흔적이 보입니다.”
이씨는 유방에 대해 “실리 위주의 선택과 전략 운용이 극단으로 치달은 면마저 보인다”고 말했다. 유방 개인을 보면 팽성에서 항우에게 쫓길 때는 말 달릴 힘을 얻고자 수레에 타고 있던 자기 자식들마저 내던져 버리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유방은 자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을 때 후의를 베풀어 준 (항우 진영의) 정공을 나중에 죽여 버리기도 하고, 가장 미워하던 옹치를 오히려 제후로 봉하기도 한다. 이는 그때그때 유방의 막료들을 통어하기 위한 암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난세의 두 영웅 외에도 진(秦)에서 한(漢)으로 건너가는 바람 부는 시기를 수놓은 수많은 인재들이 ‘큰 바람…’의 후반부에서 이씨의 날렵한 붓놀림에 힘입어 현대적 의미를 띤 채 되살아난다. 영양에서 유방이 항우 군에 포위되자 유방 복색을 하고 성 밖으로 나서는 충신 기신(紀信), 인자하기가 비길 데 없지만 뇌물로 매수한 항우 진영의 장수를 갑작스레 쳐버리는 독수(毒手)를 보이기도 하는 장량(張良), 항우와 유방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 처세를 거듭하며 자기 영역을 넓혀 가는 괴통 등이 그렇다.
이씨는 “대의명분을 정략적으로 내세우는 아시아식 마키아벨리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시기가 바로 초한(楚漢)의 싸움에서 인 것 같다”며 “그러나 유방을 보면, 이기고 짐(勝敗)의 원리는 인간의 정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인 것만 같다”고 말했다.
이천=권기태기자 kkt@donga.com
●전반부 卷 1~4 줄거리
진시황제가 순수(巡狩) 중에 죽자 유서를 위조하여 이세 황제가 된 호해(胡亥)는 그 아비에 이어 폭정을 이어간다. 이에 먼저 평민 진승과 오광이 산동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장초(張楚)를 세우고 스스로 진왕(陳王)이 되었던 진승은 오래잖아 진나라의 장수 장함(章邯)에게 잡혀 죽지만 천하는 잇따라 일어난 여러 갈래의 세력으로 어지러워진다.
그들 중에서 진승 다음으로 세력이 컸던 것은 강동 오중(吳中)에서 일어난 항량(項梁)이었다.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인 항량은 기개와 용력이 남다르고 병법에도 밝은 조카 항적(項籍·항우)을 내세워 산동을 석권하고 여러 유민군 세력을 아우른다. 그때 항량의 세력에 기대려 스스로 찾아든 세력 중에 하나가 패현(沛縣) 사람 유계(劉季·유방)였다.
유계는 패현 풍읍(豊邑) 농군의 자식으로 늦도록 패현 저잣거리를 건달로 떠돌다가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정장(亭長)이란 낮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어 번쾌 노관 주발 관영 등 패현 저잣거리의 건달들과 소하 조참 하후영 등 하급 현리(縣吏)들이 따르고 있었다. 진승의 반란으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유계는 그들의 추대로 패공(沛公·패현 현령)이 되어 한 세력을 이끌게 되었다.
처음 유계와 항적은 항량 밑에서 함께 싸웠다. 그러나 초기의 성공에 자만하던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장함의 기습을 받아 죽게 되면서 두 사람의 길은 달라진다. 초나라 회왕의 신임을 받은 유계는 서쪽으로 진나라를 치게 되고, 의심을 받던 항적은 조(趙)나라를 구원하는 일을 맡아 장함이 이끈 진나라의 주력과 싸우게 된다.
먼저 관중(關中·함곡관 안·진나라 땅)으로 밀고든 유방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무관을 넘어 함양으로 들어가 호해를 죽이고 진왕(秦王)이 된 자영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에 비해 항우는 거록(鉅鹿)의 싸움을 이기고 장함의 대군에게서 항복받은 뒤로도 다시 힘든 싸움을 거듭하다 두 달 늦게 함곡관을 넘는다. 그러나 항우는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무서운 기세로 유방을 굴복시키고 천하의 대세를 장악한다.
항우는 스스로 패왕이 되어 기름진 서초(西楚) 땅을 차지하고 유방은 한왕에 봉하여 파촉(巴蜀) 한중(漢中)에 가둬 놓는다. 그러나 유방은 한신과 장량의 도움을 받아 몰래 한중을 빠져 나온 뒤 패왕이 진나라 땅에 갈라 세워둔 세 왕을 차례로 쳐부수고 관중을 차지한다. 이어 함곡관을 나온 한왕 유방은 다섯 왕과 제후를 차례로 사로잡고 패왕이 제나라를 치러 가 비어 있는 서초의 도읍 팽성까지 함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