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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⑭北단독정권 기반 어떻게 닦았나

입력 | 2004-11-21 17:58:00

평양에 온 소련軍1945년 8월 말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이 열을 지어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소련 점령군은 그해 11월까지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통치기구의 조직을 사실상 완료했다.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세운 데 이어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켜 북한 단독 정권의 기반을 다진 것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소련 점령군은 북한에 단독 정권을 세우라는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본보 10월 11일자 A10면 참조)에 따라 그해 10월과 11월 사이에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당과 행정기관의 조직을 끝냈다. 이 때문에 우파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먼저 한반도에서 자국의 영향권 내에 있는 단독 정권을 세우는 길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물론 좌파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소련 점령군의 북한 장악 과정과 당시 남한 상황을 대비해 보면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소련 정치장교단의 “박헌영은 안돼!”

1945년 9월 하순 소련군의 고위 정치장교들이 평양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의 소련군 총정치국 제7부 차장 사포즈니코프 소장, 보로실로프의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차장 바빌로프 대령과 제7과장 메클레르 중령 등이 포함돼 있었다. 스탈린이 제시한 틀 안에서 남북한의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소련 정부가 파견한 ‘국방부와 연해주군관구 합동위원회’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여기에 평양에서 소련점령군사령부 정치부장 그로모프 대령이 합류했다.

이 위원회는 우선 서울에서 활동하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에 대해 토론했다. 결론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박헌영이 여러 파벌을 단합시켜 통일적인 공산당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고 근로 대중 사이에서 지지를 얻고 있긴 하나 많은 오류와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박헌영의 사상적 이론적 준비가 취약하고 당 활동 경험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위원회는 박헌영이 여운형과 손을 잡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한 것도 미군정의 사주를 받았을 것으로 의심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1945년 9월 하순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 고위 정치장교들은 박헌영에 대해 오류와 결함이 많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공산당의 ‘중앙’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후원으로 김일성이 부상하면서 박헌영의 위상도 달라진다. 1946년 9월 미군정청의 지명수배 직후 월북한 박헌영(오른쪽)이 평양에서 김일성과 만나는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좌경적 오류’

이 위원회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이 선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각 도의 당위원회에서 지도적 지위에 올랐다는 점을 따졌다. 특히 북한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도 이를 이해하지 못한 일부 인사들이 소비에트정권 수립을 시도하거나 무장부대를 조직해 각종 시설이나 창고를 접수하는 ‘좌경적 오류’를 범한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위원회가 조선공산당 본부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기거나 평양에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을 조직해 그곳에서 조선 전체의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제의한 것도 남북한 양쪽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에 남한의 조선공산당 간부들은 물론 북한의 조선공산당 간부들도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한 제의는 분단 현실을 인정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인 만큼 통일을 지향하는 자기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당의 주도권을 김일성에게 넘겨주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것임을 간파했다.

●북부조선분국의 “박헌영 동무 만세!”

그러나 이 위원회는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했다. 1945년 10월 1일부터 13일까지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의 예비회의와 본회의를 열고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김일성에게 커다란 진전이었다. 북한에 아무런 조직적 기반이 없던 그가 귀국한 지 불과 3주 만에 소련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정치적 거점을 확보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공산주의운동에서 김일성이 당장 주도권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분국의 책임비서에는 국내파의 김용범이 선출됐고 제2비서에도 국내파의 오기섭이 선출됐다. 김일성은 책임비서와 제2비서를 포함해 17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의 위원으로만 선출됐고 그의 핵심측근인 최용건과 김책은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분국은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중앙’으로 떠받들 것을 공식적으로 다짐하고 박헌영을 ‘조선 무산계급의 지도자’로 공인하면서 ‘박헌영 동무 만세!’를 외쳤다. ‘김일성 동무 만세!’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김일성은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북한만 통할할 임시중앙기관 출범

소련 국방부와 연해주군관구의 합동위원회는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당을 출범시킨 시점에 “북조선에서 정치 경제 문화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해 행정 경제관리를 중앙집중화해야 한다”며 북한 전체를 통할하는 임시인민위원회 창설을 제의했다. 또한 서울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도 모스크바에 보낸 서한에서 평양에 북조선 전체를 관할하는 임시중앙기관 창설을 제안했다.

소련 외무부와 국방부는 1945년 10월 17일 소련정부 명의로 ‘늦어도 11월 초까지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키도록 하라’는 지령을 평양의 소련점령군사령부에 내려 보냈다. 그 결과 북조선5도인민위원회가 출범하고 위원장에 조만식이 선출됐다. 소련측 자료에 따르면 소련점령군사령부는 소련의 점령정책에 자주 항의하는 조만식이 못마땅했지만 북한 주민들 사이에 인망이 높은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은 소련점령군 손에’

북조선5도인민위원회는 산하에 산업국 교통국 체신국 재무국 농림국 상업국 보건국 교육국 사법국 보안국 등 10개의 국을 두었다. 각 국의 인원은 20∼50명이었으며 조선인만이 국의 장(長)과 직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각 국의 국장은 소련 점령군이 임명했고 각 국엔 소련인 고문이 배치돼 업무를 지휘했다. 따라서 각 국은 철저히 소련 점령군의 통제와 지시를 받았다. 각 국이 포고문을 발표할 때마다 거기에는 ‘소련군사령부 명령에 의해’ 또는 ‘소련군사령부와 합의하에’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소련 점령군은 검찰과 법원에도 소련인 고문을 배치해 수사와 재판을 ‘감시’한다고 발표했다. ‘이제 모든 것은 조선 인민들에게 달렸다’는 소련 점령군의 첫 포고문과는 달리 ‘이제 모든 것은 소련 점령군에 달렸다’가 된 것이다. 소련 점령군은 친소적인 민간단체들을 만들어 주민 속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대표적 단체가 1945년 11월 11일 평양에서 결성된 ‘조쏘문화협회’로 이 협회는 소련의 문화작품과 영화를 북한에 폭넓게 소개했다. 이 협회가 배포한 서적은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러시아혁명에 대한 소책자들이 대종을 이루었다.

●‘남조선혁명에 대한 수혈의 원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아래에서 소련 점령군과 김일성은 1945년 11월 17일 평안남도 용강군에 ‘평양학원’을 세웠다. 북한을 통치하는 데 필요한 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은 오늘날 이 학교를 ‘첫 군사정치간부양성기지’였다고 부른다. 김일성 스스로 명예교장을 맡을 정도로 이 학교를 중시했고 실제로 이 학교 졸업생들이 뒷날 김일성정권의 두뇌와 손발이 된다.

이렇게 볼 때 1945년 11월 중순께 북한에서는 이미 단독 정권의 기반이 다져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남한에서는 아직 거기에 상응하는 구체적 조치가 없었다. 해방공간에서 단독 정권, 달리 표현하면 분단 정권을 먼저 세워 나간 쪽은 분명히 소련이었다. 당시 박헌영이 북한을 ‘남조선혁명에 대한 수혈의 원천’이라고 부르면서 소련군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한 것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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