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사건이 알려지면서 각 언론사와 광주시교육청, 수사를 진행 중인 광주 동부경찰서 등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고교생들만으로 그런 큰일을 벌였다니… 믿을 수 없다”는 글들이 꼬리를 잇고 있다.
경찰은 “좋은 성적을 얻어야겠다는 강박관념에다 청소년기에 흔히 나타나는 일종의 ‘치기’로 고교생들이 일을 꾸민 것 같다”며 브로커 등 외부 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으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또 사전에 인터넷과 전화 등을 통한 부정행위 제보가 있었는데도 왜 이를 막지 못했는지, 비단 광주에서만 이런 부정행위가 저질러졌는지도 풀어야 할 의문이다.
▽사전에 막을 수 없었나=광주 동부서 김영월 수사과장은 21일 브리핑에서 “수능 전날인 16일 오후 6시40분경 한 학생에게서 제보를 받아 광주교육청의 협조 아래 바로 수사에 들어가려 했으나 시험 전날이라 더 이상 조사할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제보자에게서 “휴대전화를 대량으로 구입해 부정시험을 치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지구대 직원을 보내 직접 그 학생과 만나게 해 6명의 가담 용의자 명단까지 입수했다는 것.
경찰은 광주교육청에 즉시 수사에 착수할 뜻을 전달하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교육청은 “제보만 가지고 수사했다가 해당 학생이 시험을 못 치르면 어떻게 뒷수습을 할 거냐. 일단 시험을 끝내고 (수사)하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경찰은 고사장에서의 용의자 긴급체포는 보류한 채 휴대전화 통화내역 조회 등 간접수사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이 사건을 신속히 파악해 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제보 덕분이지만 왜 좀더 적극적으로 사전 수사에 나서지 않았는지, 또 교육청은 왜 대규모 부정행위에 대한 제보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는지가 해명돼야 할 것이다.
▽외부 세력의 개입 없었나=이번 사건은 ‘100여명의 가담자 구성’ ‘휴대전화 단체구입’ ‘고시원 투숙’ 등 고교생들만으로 이뤄진 범죄라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많다. 이 때문에 브로커 등 외부세력이 없는지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다.
20일 오후 경찰의 중간 수사결과가 나오자 광주 동부서 홈페이지에는 자신의 신분을 모 고교 학생이라고 밝힌 누리꾼(네티즌)이 실명으로 “모 고교의 경우 주동자가 20명이 넘고, 과목당 30만원씩 내고 참가한 사람이 수십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남경찰청은 21일 전문브로커 등 제3자 개입설과 관련해 “단정적으로 ‘아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이미 체포한 2명의 고교생을 주범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조직적으로 했다고 보기엔 어설픈 점이 너무 많다”며 “‘브로커 개입’이나 ‘거액 거래’ 등 인터넷 등에 떠도는 괴담은 정말 괴담 수준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 가담자들이 1인당 30만∼50만원의 돈을 낸 것으로 알려지자 인터넷사이트 등에서는 학부모 또는 선배, 심지어 교사들의 묵인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21일 오후 광주시교육청 사이트에 스스로를 ‘학부모’라며 올린 ‘사죄의 글’은 이 같은 의혹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 글은 “무슨 말씀을 올려야 될지 죽을 만큼의 참담함으로 몇 자 올린다”며 “고시원에서 공부한다는 말에 아들의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이 또한 못난 부모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수밖에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라고 적었다. 이번 사건을 최소한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학부모의 사전 인지 사실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단순히 알고 있었거나 돈을 줬다는 사실만으로 형사처벌 대상이 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지역에선 부정 없었나=이번 사건이 터지자 동아닷컴(donga.com)을 비롯한 인터넷사이트에는 “이 같은 시험부정이 광주라는 특정지역에서만 이뤄지는 일은 아니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수험생’이라는 한 누리꾼은 자신이 시험을 치른 모 고교를 비롯해 3개의 고교를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여러 학교에서 수능 부정이 계획되고 실제 행해졌다”고 주장했다.
또 ‘부산 학생’이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사건이 너무 커졌다. 내가 부산에서 시험 치를 때만 해도… 휴대전화로 커닝하는 것은 기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남경찰청 관계자는 “규모와 수법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번 사건과 유사한 부정행위는 전국 어느 지역에서나 일반적이라는 것이 학생들의 말”이라며 수사를 확대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 다른 지역에서 광주에서와 같은 대규모 부정행위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광주=김 권기자 goqud@donga.com
▼경찰이 밝힌 범죄수법▼
‘바형’ 전화기로 송신
부정 혐의 수험생들이 사용한 송신용 휴대전화기는 ‘바(Bar)형’으로 폴더를 여닫을 필요가 없다. 광주=뉴시스
광주에서 발생한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 사건은 사전 모의, 예행연습, 담당역할 분담 등 학생들로서는 비교적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지금까지 부정행위에 참여한 것으로 드러난 인원은 모두 100여명. 이들은 시험을 치며 정답을 보낸 ‘선수’ 40명과 이들의 답을 받아 모범답안 표를 만든 ‘중계조’ 후배 40명, 순수하게 수혜만 본 학생 20여명 등이다.
선수들은 정답을 보내고 다시 모범답안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혼란스럽지 않도록 송신용과 수신용 휴대전화기 2대를 따로 준비했다.
송신용 휴대전화는 바깥에서 봐도 어색하지 않도록 끈 등을 이용해 겨드랑이 밑에 고정시킨 뒤 시험시간 내내 ‘통화 중’ 상태를 유지했다. 그런 뒤 감독이 봐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휴대전화를 ‘툭툭’ 쳐 소리 횟수로 답을 송신했다.
수신하는 중계조 후배들은 선수 1명당 1명씩 배치됐다. 고시원의 조용한 방에서 헤드폰 등을 끼고 선수들이 툭 치는 횟수에 따라 들리는 ‘삑’ 소리를 수신했다.
후배들은 답들을 모두 모아 문제당 가장 많이 나온 답을 정답으로 간주해 모범답안 표를 짰다. 이들은 이렇게 작성한 모범답안을 선수들과 순수 수혜조 수험생의 호주머니에 든 수신용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로 다시 보냈다.
이 같은 부정행위는 8월경부터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터넷에 떠돌던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 수법’을 참조한 주동자들이 이때부터 광주 모 중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가담자를 모집했다는 것.
일부 학생은 조사에서 “인터넷에 부정행위를 하기 좋은 휴대전화 기종이나 정답 전달방식 등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면서 “선배들도 몇 년 전부터 이와 비슷한 방식의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어느 정도 인원이 모인 뒤에는 지난달부터 이러한 수법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예행연습도 몇 차례 했다. 특히 “학교 모의고사 때도 연습했다고 들었다”는 진술도 있어 경찰이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가담자들은 휴대전화 구입과 중계조가 이용한 고시원의 숙박비, 동원된 후배들의 식사비 등을 조달하기 위해 각자 돈을 냈다. 금액은 1인당 10만∼100만원으로 성적이 나쁜 학생일수록 많이 낸 것으로 알려졌다.
중계조가 이용한 고시원은 2, 3평짜리 방 40개를 갖추고 있다. 각 방에는 책상 소형냉장고, 간단한 샤워시설이 있으며 방 크기에 따라 하루 단위로는 5만∼12만원을 받는다.
가담자들은 수능시험 전날인 16일 오후 9시경 이 고시원에 들어가 각각 5만원과 7만원을 주고 방 2개를 잡았다. 이어 수능 당일 오후 7시경 동구 산수동의 한 어린이놀이터에서 전원이 모여 최종 점검을 한 뒤 흩어졌으며 중계조는 개별적으로 이 고시원에 들어갔다.
광주=정양환기자 ray@donga.com
김 권기자 goqu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