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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16)영화제작자 심재명씨편

입력 | 2004-11-21 19:55:00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운 동시상영관은 여러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매력 외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소시민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진은 1970년대 서울 뚝섬의 한 동시상영관. -동아일보 자료사진


1970, 80년대 재개봉관의 풍경은 어둡고, 냄새나고, 음습한 것이었다.

그땐, 개봉극장에서 상영이 끝난 영화가 바로 비디오 출시로 이어지지 않고 재개봉, 재재개봉을 거쳤던 때였다. 그러니까 적어도 6개월간, 혹은 1년여까지 도심에서, 변두리에서, 어느 초라한 뒷골목에서 한 영화의 필름을 감은 영사기는 계속 돌아갔던 것이다.

필름 한편의 수명이 이렇게 길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스크린엔 죽죽 줄이 가고(비가 내린다고 표현했다), 스크린 앞으로 쥐가 지나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때 그 시절, 극장에서 만났던 아저씨들이 생각난다.

서울 청량리에 있었던 H극장은 소위 삼봉관. 그러니까 한번에 두 편씩 볼 수 있는 영화관이었다. 그 극장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두 편의 프로그램 조합이 절묘했기 때문이다. 주윤발의 영화들, 이를테면 ‘영웅본색1’과 ‘영웅본색2’를 묶는다거나 그 당시 유명했던 홍콩 서극 감독 영화를 나란히 볼 수 있게 하는 식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해도 될 만큼 프로그램 짜는 데 공을 들였던 것이다.

자주 그 극장을 들락날락거렸던 나는,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한 아저씨를 휴게소나 매표소에서 자주 보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저씨에게 영화는 단순한 돈벌이 이상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눈만 뜨면 영화관을 찾았던 나는, 사회생활 역시 영화사와 극장을 함께 운영하는 곳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디지털방식으로 대형 사진을 뽑는 기술이 없었던 그때는, 극장의 얼굴은 바로 손으로 그린 대형 입간판이었다. 극장 마당 뒤쪽에 이 대형 간판을 그리던 아저씨들의 사무실이자 작업실이 있었는데 새 영화가 올라가기 전 며칠 동안 이들은 간판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기획실 막내였던 내가 간판에 그릴 사진들을 가지고 쪼르르 달려가 문을 빠꼼히 열고 들어가면 ‘미술부장’으로 불리던 그 아저씨들은 언제나 다방 커피를 시켜주곤 했다. 한국 배우들의 얼굴은 서양 사람보다 밋밋해 닮게 그리기 어렵다거나, 저번 영화가 너무 ‘롱런’해 간판 수입이 줄었다거나 영화 스틸사진을 보니 이번 영화에는 손님 좀 몰리겠다거나 하는 잡담들이 커피의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오르곤 했다.

그때 그 시절, 극장에서 만난 그 아저씨들은 이제 머리 하얗게 센 할아버지들이 되어 있을 거다. 영화관을 제 집처럼 들락거리다가 아예 영화 일을 ‘업’으로 삼아버린 그때의 아가씨는, 이제 아줌마가 되어 그 아저씨들을 궁금해한다.

○ 심재명씨는

△1963년생 △1992년 명기획, 1995년 명필름 창립 △2004년 1월 ㈜강제규필름 ㈜세신버팔로와 기업결합으로 ‘MK버팔로’ 설립. 현재 이 회사의 이사 △‘접속’ ‘조용한 가족’ ‘공동경비구역JSA’ ‘해피엔드’ ‘바람난 가족’ 등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