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느덧 달력 한 장만을 남겨 두고 있다. 예전에 읽었던 어느 인류학자의 글이 생각난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지역에 사는 사람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고 느끼며, 사시사철 덥거나 추운 지역 주민일수록 세월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왜 삶이 이리도 정신없이 지나가는지, 수수께끼의 한 자락이 풀리는 듯도 하다.
한데 세상살이의 번잡함은 계절이 자주 바뀌는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사회 변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사회 변화 속도와 구성원들의 행복도 사이에는 포물선 관계가 있다고 한다. 곧 변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를 경우 방향감각 상실에 따른 불안감과 속도의 가속화에 따른 혼란을 경험하게 되고, 거꾸로 지나치게 느릴 경우 전망 부재에 따른 무력감 및 사회적 동력 상실에 따른 불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네 경우는 전자에 해당될진대, 관건은 구성원들의 충족감 및 자발적 의지를 최적화하는 변화 속도를 찾아내는 일이 되리라.
▼누적된 개혁 피로감▼
올 한 해도 예외 없이 ‘다사다난’이란 수식어가 우리네 주위를 떠돌 것이 분명하다. 최근만 해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사건에, 국민연금의 한국형 뉴딜사업 투자 여부를 둘러싼 공방에, 환율 하락으로 수출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에, 주가도 하락한다는 얘기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되돌려 보면 고등학교 등급제 파문에,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위헌 결정으로 인한 일파만파에, 과거사 바로 세우기 논쟁에, 덧붙여 대통령 탄핵의 소용돌이까지 겪어 내지 않았던가.
그러노라니 우리에겐 의도된 건망증이 제2의 습관처럼 굳어져 버린 것만 같다. 어차피 세월이 약인 것을, 임기응변과 자기합리화는 날로 정교해 간다. ‘지금 이 고비만 넘기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곧 사라질 것을….’ 직무 유기와 책임 회피가 현명한 처세술로 치부되어 온 건 아닌지…. 그 덕분에 생활화된 망각 속에서 동일한 패턴의 문제들이 별다른 해결 기미 없이 모습만 달리한 채 우리네 삶을 위협해 와도 그저 속수무책 수수방관해 온 것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은 아닐는지.
아직 한 장의 달력이 남아 있는 지금이라도 망년(忘年)에 몸을 맡기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대통령 탄핵이란 전무후무한 사태가 대통령-국민-정치권의 삼각관계에서 진정 어떠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는지 냉정히 되짚어볼 때만 정치적 시행착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것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의 밑그림 또한 제대로 나와 줄 것이다.
신용불량자 급증이 부메랑이 되어 우리 경제의 부담으로 돌아온 지금,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느라 급급하기만 한데 문제가 이토록 심화되기 전, 문제의 징후가 감지되자마자 왜 문제가 야기되었는지 그 원인을 따져 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우(愚)는 피할 수 있었을 게다.
▼의도적 망각이 문제 더 키워▼
고교생, 그들만의 부정행위라기엔 제법 치밀한 이번 휴대전화를 이용한 부정행위만 해도 곰곰 생각해 보면 학벌주의의 폐해를 방기해 온 기득권층의 무책임,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은 상관없다는 메시지를 암암리에 주입해 온 입시위주 교육제도의 무모함, 나아가 정보통신기술 역시 이를 사용하는 개인과 사회의 성숙도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간과해 온 우리 모두의 무방비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재발할 가능성을 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 “나보다 바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이라는데, 도대체 왜 바쁜지 그 이유라도 알고 나면 바쁨을 다스릴 수 있는 여지가 생길 듯하다. 개혁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는 지금이야말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변혁에 ‘올인’해야 하는지, 개혁의 정당성은 유효했는지, 지금까지 걸어 온 과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반성할 때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