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울려고 해요. 그렇지만 팬들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지도….” 한국 남자 발레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원국씨(37)가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의 왕자 역을 떠난다. 그는 10월 초 국립발레단 지도위원을 그만뒀고, 연말 ‘호두까기 인형’ 무대에서 마지막으로 왕자 역 춤을 춘다. 그가 12년째 맡아 온 왕자는 팬들에게 그의 분신으로 각인돼 있다. 》
25일 오후 국립발레단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둥지를 떠나는 아쉬움이나 불안보다 새 출발에 대한 설렘의 표정을 더 내비쳤다. 그가 국립발레단을 떠나는 이유는 몸의 한계 때문.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떠나야 하기 때문에 늘 준비해 왔다”며 “화려한 메이저리그에서 알찬 마이너리그로 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국립발레단의 최장수 발레리노로 꼽히지만, 정상에 있을 때 떠나고 싶다는 모든 스타의 염원처럼 그도 최근 3, 4년간 고별을 준비해 왔다.
그는 내년 3월 15∼20명의 단원으로 ‘이원국 프로젝트’(가칭)를 구성해 전국 소극장 순회공연을 펼친다. 발레리노로서 드물게 두꺼운 팬층을 가진 그가 소품 공연을 통해 발레 대중화에 한몫하고 싶다는 것이다.
권주훈 기자
그는 한국 남자 발레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국 남자 발레는 그의 전과 후로 나뉜다는 것이다. 동의하느냐고 물었더니 “나를 기준으로 선배와 후배들의 춤이 다르다는 말인데, 그 흐름은 함께 춤을 춘 이들이 이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몸의 성장이 거의 끝나가는 20세에 뒤늦게 발레에 들어섰다. 그것도 공고를 다니다가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했다. 미국 뉴욕에서 1년간 공부한 것을 제외하면 순수 국내파다. 이런 ‘스타 탄생’은 우연이었을까?
“잠재 재능이 꿈틀거렸겠지요. 하지만 더 일찍 배웠다면 폭넓은 자아를 가질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감동은 예술적 정신적 깊이에서 나오는데, 내 춤이 그랬는지는 의문입니다.”
발레에 입문한 뒤 그는 여유를 갖지 못했다. 왜 연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연습장에 가야 불안이 가셨다. 지금도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직접 운영하는 학원에 오는 학생들의 동작이 매끄럽지 않으면 “잠이 오냐”고 꾸짖는다. 원하는 동작과 몸의 선을 이루기 전까지는 잠을 자지 않던 그다.
최고의 무용수들은 몸의 모든 근육을 통제한다. ‘(안으로)힘을 주되 (밖으로는)힘을 빼라’는 내강외유(內剛外柔)의 역설을 체득하지 못하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그는 “춤을 추다 보면 몸이 정밀한 첨단기기 같다는 느낌이 온다”며 “인간이 곧 우주라는 말도 있지만, 그 원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아름다운 선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10여년간 한국 발레리노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러나 ‘명예로운 고별’ 이후 예술가로서의 삶은 자기 책임일 뿐이다. 이는 열악한 한국 발레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것저것 생각하면, 일찍부터 그만둬야지요.(웃음) 하지만 그 열정을 어떻게 막아요?”
그는 발레리나 장윤미씨(26)와의 사이에 딸 예진양(2)을 두고 있다. 딸이 벌써 발레 동작을 흉내 낸다며 싱긋 웃는 그에게 ‘이원국 프로젝트’는 제2의 열정이었다.
국립발레단 ‘호두까기 인형’ 공연은 12월 21∼28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 이원국은 26일 오후 7시반 공연에 윤혜진씨를 파트너로 무대에 선다. 1588-7890
○이원국은?
△1967년 부산 출생 △동명공고 △중앙대 무용학과 △1989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 △1993∼96년 유니버설발레단 주역 무용수 △1995년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 객원 주역 △1995∼1996년 루마니아 부큐레슈티 국립발레단 객원 주역 △1997∼2004년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 △2001년 모스크바 국제발레 콩쿠르 베스트 파트너 상 수상
허 엽기자 h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