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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소설가 신경숙씨와 펜팔친구

입력 | 2004-11-28 18:02:00

1970년 7월 우리나라에 처음 우편번호제가 도입됐을 무렵의 우편집배원. ‘펜팔 친구’는 우편번호제의 활성화로 활짝 핀 우리 편지 문화와, 마음의 벗을 향해 진솔한 정을 써서 보내는 ‘육필 문화’가 함께 낳은 산물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는 70, 80년대에 라디오를 참 열심히 들었다. 그 시절 나 같은 애청자들이 많았던 것 같다. 나는 주로 라디오의 가요프로그램을 통해 노래를 배웠다. 나를 매혹시키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얼른 노트를 펴고 따라 적었다. 그렇게 배운 노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가끔 혼자서 나도 모르게,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흥얼거리다가 이 노래를 어떻게 다 외웠지? 놀랄 때가 있는데 그때 받아쓰기 하듯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외운 덕분 같다.

어느 날엔가 라디오에서 이런 멘트가 흘러나왔다. 서울 수유리의 효진씨는 펜팔 친구를 원한다고 하네요, 효진씨와 펜팔 친구를 하실 분들은 주소를 받아 적으세요. 펜팔 친구? 라디오에서 펜팔 친구라는 말을 처음 듣고, 가만 보니 잡지책 뒤에 펜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 낯선 사람들의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펜팔 친구를 원한다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낮에 다니던 회사의 주소를 적어 보내봤다. 이름도 윤영인지 지현인지로 바꾸었다. 나이도 스물 두 살인지, 스물 세 살로. 우선 다른 이름을 써야 동료들이 모를 것 같았고, 나이 어린 여고생보다는 스무 살이 넘은 처녀라야 편지가 한 통이라도 올 것 같았다.

“와∼.” 그 후 낯선 사람들로부터 날아드는 편지라니.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외로운 이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한 장 한 장 다 뜯어 읽었으나 나중에는 정말이지 시간이 없어 다 읽어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수많은 편지 중 몇몇에게는 따로 내 자취집의 주소를 알려주고 편지 교류를 했다. 그 시절의 내게 편지 쓰기란 숨쉬기 운동과 비슷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주소를 들고 집을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마스 무렵의 겨울이었다. 머리와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길고 게다가 감기에 걸렸었는지 흰 마스크까지 쓰고 검은색 긴 코트를 입은 남자가 윤영인지 지현이를 찾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집에는 수없이 방이 많았다. 더구나 그 집에 경숙이는 있어도 윤영인지 지현이는 없었다. 나는 수돗가에 서서 글씨체와는 다르게 좀 무섭게 생긴 그 남자가 여기 윤영씨 집 아닌가요? 물었을 때 그런 사람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펜팔 친구를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한 그 남자는 두리번거리다가 기침을 해대며 돌아갔다.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문득 그 남자도 자신의 본명을 사용했을 리는 만무했겠군, 싶다.

서로 현실의 얼굴과 이름과 나이를 숨기고 오로지 편지를 소통 도구로 삼아 생의 다른 곳을 꿈꾸던 그런 때가 있었다.

소설가 신경숙

○신경숙씨는

△1963년 생 △1985년 ‘겨울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 △대표 장편 ‘외딴 방’ ‘깊은 슬픔’ 등과 창작집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등을 펴냄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