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노예선 종(Zong)호는 1781년 9월 6일 아프리카 해안을 떠났다. 노예를 사들여 사탕수수 농장이 있는 영국령 자메이카로 가는 길이었다. 곧 문제가 생겼다. 3개월이 채 안 되는 동안 7명의 선원과 60명의 흑인 노예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원인은 질병과 영양실조. 당시 기록은 “흑인 노예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쇠사슬로 팔과 다리가 묶인 채 한 명이 있어도 부족한 공간에 수용됐다”고 전한다.
11월 29일 선장인 루크 콜링우드는 선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노예가 병에 걸려 죽으면 우리가 물어내야 하지만 노예를 바다에 던지면 보험사가 책임을 지게 돼 있다.”
당시 영국 법은 이랬다.
‘보험업자가 노예의 손실에 대한 책임을 지지만 노예의 자연사는 예외다. 자연사에는 병사와 자살이 포함된다. 그러나 노예가 살해된 경우나 선상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진 경우는 보험업자가 책임을 진다.’
결국 3일에 걸쳐 총 133명의 병든 노예가 산 채로 바다에 던져졌다.
배가 영국에 도착한 후 선주인 제임스 그렉슨은 보험사에 보상을 청구했고 보험사가 거부하자 소송을 냈다. 결과는 패소. 보험금을 타낼 목적으로 노예들을 바다에 던졌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소송을 계기로 노예무역의 실태가 알려지면서 영국 내에서 노예무역 반대 움직임이 처음 일어났다.
노예무역은 본국과 아프리카, 식민지를 잇는 3각 무역의 형태로 이뤄졌다. 초기 노예무역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장악했으나 영국과 덴마크가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였다. 한창 때인 1771년에는 영국만 해도 190척의 노예선이 4만7000명을 운반했다. 흑인 노예들은 17∼19세기 1500만명이 팔려간 것으로 추산된다. 노예들은 항해 도중에 6분의 1 이상이 사망했고 농장에서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다시 3분의 1이 사망했다.
알렉스 헤일리의 소설 ‘뿌리’에서 어린 쿤타 킨테는 묻는다.
“아버지, 노예가 뭐죠?”
“노예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종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노예는 그저 운반하기 까다로운 화물일 뿐이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