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정쟁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국회가 2005년도 예산안 심의를 편법 또는 졸속으로 처리하는 사례가 많아 비판을 받고 있다.
상임위 심의 과정에서 각 부처가 국무회의에서 승인을 받지 않은 사업예산안을 ‘불쑥’ 끼워 넣는가 하면 국회의원들은 지역 민원 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예산을 경쟁적으로 늘리고 있다. 또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예산안 처리부터 먼저 해놓고 보자는 ‘반칙’도 속출하고 있다.
▽국무회의 심의도 안 받고 ‘끼워 넣기’=행정자치부는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서 공공근로행정데이터베이스(DB) 구축사업으로 막판에 1225억원을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이 예산은 국무회의 심의도 받지 않은 것이다. 원칙대로 한다면 국무회의 심의를 거치고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뒤 국회에 수정예산안을 제출해야 한다(국회 예산회계법 제32조).
하지만 각 부처가 이런 식으로 막판에 밀어 넣은 예산은 수두룩하다. 정보통신부는 당초 내년도 원-달러 환율을 달러당 1150원으로 잡고 예산안을 편성했다가 1050원으로 수정하는 바람에 당초 3조5000억원이었던 DB구축사업 예산안은 4000억원 더 늘어났다.
또 경찰청이 광역교통정보기반확충사업에 417억원을, 건설교통부는 지능형교통시스템(ITS) 사업으로 1100억원을 각각 막판에 예산안으로 끼워 넣는 데 성공했다.
‘막판 끼워 넣기’ 예산은 주로 정부와 여당이 내년에 경기진작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뉴딜 정책’과 연관성이 있는 사업들이 많다. 이미 1조원가량이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넘어간 것으로 추산된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챙기기’=보건복지위 소속의 한 의원은 부처 공무원으로부터 “다른 상임위에선 예산을 서로 올려주려고 야단인데 왜 여기는 이렇게 인색하게 하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정부 부처는 기획예산처의 새로운 예산편성 지침에 따라 ‘톱다운(top down)방식’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있다. 예산 총액을 정해 놓고 우선순위에 따라 배정하므로 특정 사업 예산을 늘리려면 다른 부문은 깎도록 해 놓았다.
하지만 국회에 오는 순간 이런 원칙은 무너지게 된다. 상임위별로 소속 의원과 부처간의 이해가 맞아 떨어지면서 무분별하게 증액을 하는 사업이 허다하기 때문. 아직 예산 심의를 마치지 않은 정무위와 보건복지위, 운영위를 제외한 나머지 13개 상임위에서 증액한 예산만 이미 3조원을 넘어섰다. 국회 예결위 관계자는 “상임위에서 늘어난 예산은 대부분 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 사업들이다”고 밝혔다.
▽법안 처리는 나 몰라라, ‘예산부터 먼저’=법안은 아직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예산부터 먼저 챙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법률 따로, 예산 따로’의 기형적인 국회의 일처리 방식 때문이다.
행자부는 지방교부세법 개정을 전제로 지방교부세 19조4885억원을 예산에 이미 편성해 놓았다. 지방교부세율을 18.3%에서 19.13%로 상향조정한다는 법개정 취지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 법은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농림해양수산위도 ‘농수산물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 통과를 전제로 관련 기금 예산 6100억원을 편성했고, 보건복지위는 내년도 담뱃값 인상분까지 예상해 건강증진기금 예산을 편성했다가 야당의 반발을 사고 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