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뒤면 2005년이다. 노무현 정권은 어느덧 3년차를 맞는다. 농사로 치면 곡식 거둘 채비를 할 때다. 이미 탄핵 돌파 직후에 “이제 하산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발 삐지 않고 잘 했으면 좋겠다”고 심경을 밝힌 대통령이다. 무사한 하산과 하산 뒤를 위해 여러 대비를 하고 싶겠지만 첫째는 ‘국민의 삶을 보살핀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닐까.
▼성장과 분배 다 놓친 정권▼
지금까지 노 정권의 경제작황은 아무리 봐도 흉작이다. 내년은 광복 60년이지만 민생엔 빛보다 어둠이 훨씬 짙다. 수많은 국민이 희망 아닌 절망에 직면해 있다. 이런데도 대통령이 권력게임, 주류 교체, 노무현 코드의 완성, 그리고 이런 것과 연계되는 ‘남북 정치’에 더 몰입한다면 경제는 ‘잃어버린 몇 년’이 될지 모른다.
대통령은 2주 전 남미에서 “경제성장이 지난해 3.1%, 올해 5%에 그쳐 매를 맞아도 싸다”고 했다. 그러나 자책(自責)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는 발언이 귀국 후 청와대에서 나왔다. “대통령이 반(反)시장, 반기업적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지금 하고 있는 대로 경제원칙을 지켜 나가겠다.”
경제의 종합 성적이 매를 맞을 지경인데도 고치고 바꿀 게 없다면 무얼 기대할 수 있나. 그동안의 우왕좌왕 좌충우돌이 경제원칙인가.
노 정권은 성장과 분배를 함께 잡겠다고 했지만 동시에 놓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는 대통령이 말한 대로다. 하지만 양극화 해소를 되뇐다고 격차가 좁혀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가진 자는 성장 없이도 버틸 수 있지만 덜 가진 자는 더 힘겨워지고 못 가진 자는 속수무책이다.
양극화 해결에 승부를 걸겠다고 강조할수록 가진 쪽은 더 방어적으로 행동한다. 돈을 숨기거나 해외로 달아난다. 결국 돈이 나라 안에서 흐르지 않아 못 가진 쪽의 일자리와 소득만 줄어든다.
분배와 평등을 외치고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적개심을 키우는 것이 정략적으론 유효할 수 있다. 그 대가는 국민이 치른다. 투자와 소비의 실종에 따른 성장의 추락이고, 결국 분배의 악화다. 좌파 이념인지, 포퓰리즘(대중인기주의)인지, 둘 다인지 몰라도 그쪽으로 기울수록 경제는 망가지고 취약계층부터 무너진다.
빈부 격차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대신, 가진 쪽에 ‘사유재산을 지켜 준다’는 믿음을 심어 주고, 투자건 소비건 하고 싶은 분위기를 북돋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강자가 더 갖기는 했겠지만 약자들도 성장의 열매를 지금보다는 더 많이 분배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저성장, 하향 양극화’가 아니라 ‘고성장, 상향 양극화’다.
기업들은 투자를 일으키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며 기업도시에 대한 규제를 풀어 달라고 했다. 돌아온 답은 특혜는 안 된다며 투자의 통로를 곳곳에서 막는 기업도시법이었다. 밥을 짓지도 못하게 해 놓고 네 숟가락만 커서는 안 된다는 소리나 하는 격이다. 그러고는 기업들이 투자를 안 하니 국가가 나서야 한다며 국민 부담은 생각도 않고 예산 늘리기에 바쁘다.
개혁한답시고 기업에는 온갖 빗장을 채우면서 정부가 직접 해결하겠다는 발상이 바로 반시장적이고 좌파적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진작 실패했고 폐기된 모델이다.
▼이념형 몽상가들로는 안 된다▼
노 정권이 “강남만 불패(不敗)냐, 노무현도 불패다”면서 펴 온 부동산정책의 결과는 양면적이다. 아파트 값이 떨어졌다. 고소하다는 사람이 많아 총선에서도 남는 장사였다. 다른 결과는 부동산 경기 냉각이다. 일자리도 줄었다. 집값도 주로 작은 아파트만 떨어졌다. 이런 결과를 놓고 시장적이라 할 수는 없다. 투자와 경기를 독감 들게 해 놓고 약이라고 내놓는 게 국민연금 동원하는 ‘한국판 뉴딜’이다.
대통령은 토론과 학습을 좋아한다. 임기 3년차엔 ‘정책의 복합결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해 보이는’ 청와대 안팎의 이념형 몽상가들하고만 그런 지적(知的) 작업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시장의 소리를 바로 듣고, 경제성적을 올리기 어려운 발상과 정책에서 U턴하기를 바랄 뿐이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