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은행에서 퇴출된 계모씨(46). 지난해와 올해 두 차례 창업 아이템과 창업 방법을 상담하기 위해 인천소상공인지원센터를 찾았다.
창업상담사는 계씨에게 “전 직장의 경험을 살리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인터넷 사이트 몇 곳을 추천했다. 실망한 계씨는 상담사의 이력을 알아봤다. 그 역시 자영업 경험이 없는 중앙부처 공무원 출신이었다. 다른 상담사들도 은행지점장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후로 계씨는 지원센터를 찾지 않는다.
한 나라의 자영업이 튼실하려면 건강한 자영업 문화와 성공적인 창업을 돕는 창업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 한국에서는 자영업 문화라고 이름을 붙일 만한 실체가 없다. 상인(商人)을 천대하는 유교문화의 전통, 정부와 학계의 무관심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자영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한국 사회에는 자영업에 대한 잘못된 속설이 난무하고 이는 ‘실패가 예정된 창업’으로 이어진다.
노점상서 시작한 호주 ‘해리스 카페’
햄버거와 음료수 등을 판매하는 호주의 ‘해리스 카페’는 작은 노점상이었지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청결한 매장관리로 인기를 끌었다. 이 가게는 호주 전역으로 매장을 넓혔으며 최근에는 미국에서까지 프랜차이즈 제의가 들어올 정도로 성장했다.-사진제공 창업전략연구소
대표적인 것이 ‘먹고 마시는 장사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매물로 나와 있지만 팔리지 않는 수많은 가게가 이를 입증한다.
한국창업학회 회장인 동국대 박춘엽(朴春燁·산업공학) 교수는 “음식업 등 소규모 서비스 업종이 쉽게 돈을 번다는 인식은 과거에 경쟁이 적어서 생긴 것”이라며 “요즘은 10곳 중 한 곳도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할 게 없으니 장사나 해야겠다” “열심히 하면 인건비는 건지겠지”하는 말도 자영업에 대한 무지(無知)에서 나온 말.
이인호(李仁浩) 창업e닷컴 대표는 “아무리 소규모로 창업을 하더라도 자영업은 부도 리스크를 안고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라며 “해당 분야 지식 외에도 세무, 인력관리, 마케팅 등 경영전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창업 인프라의 미비=외환위기 후 소상공인지원센터를 통해 창업자금을 지원받은 자영업자는 8만여명. 이들 중 센터에서 창업 교육을 받은 자영업자는 4000여명에 그친다. 그나마 4000여명도 하루 8시간짜리나 3박4일 창업 프로그램을 이수하고 창업 대열에 나섰다. 기초훈련도 없이 총 쏘는 법만 가르쳐 전쟁터로 내보낸 셈.
컨설팅 회사를 찾거나 예비 창업자끼리 정보를 교환해서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이모씨(51·여). 그는 1997년 예비 창업자들의 모임에서 “월 200만원 순이익이 보장되는 커피숍이 매물로 나와 있다”는 말을 듣고 주저 없이 인수했다. 2년여가 지나 주변에 세련된 인테리어에 주차장을 갖춘 커피숍이 늘어나자 주차장이 없는 이씨의 커피숍에는 손님이 줄기 시작했다.
매출이 줄자 인테리어를 바꾸거나 주위의 주차장을 임차할 돈도 마련할 수 없고 그래서 손님이 더 오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이씨는 작년 초 가게를 내놨으나 팔리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자격증을 도입하거나 공신력 있는 민간협회 등을 설립해 컨설팅의 질을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상헌(李相憲) 창업경영연구소 소장은 “창업 상담사의 역할과 자격을 구체적으로 정해 자격증을 부여해야 한다”며 “미국에서 정부 공인을 받은 창업 상담사는 상당수가 억대 연봉을 받는 전문직”이라고 말했다.
▽선진국의 창업 인프라=선진국의 창업 프로그램은 전문가들이 일대일 방식으로 1년 이상 창업 교육을 제공한다.
최근 호주 현지에서 창업 인프라를 둘러본 이경희(李京姬) 창업전략연구소 소장은 “멜버른의 모나시대학 기업보육센터의 경우 회계사 출신의 센터장을 포함해 각 분야의 비상근 전문가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해 예비 창업자에게 1년 이상 창업 관련 교육을 제공한다”며 “창업자가 원할 경우 교육기간을 1년 연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경희 소장은 또 “매달 한 번씩 자문위원과 예비창업자들이 모여 창업 진행상황과 문제점에 대해 점검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1000여개의 미국 소기업개발센터는 산학연 협동프로그램이 특징. 지역대학 교수와 은퇴한 자영업자, 기업가 등 현장 실무경험을 가진 이들이 함께 예비 창업자를 돕는다. 창업 도우미들이 다양한 전문가로 구성돼 학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원이 동시에 가능하다.
또 선진국의 창업 교육은 음식점이나 구멍가게 등 생계형 자영업 창업을 권유하지 않는다. 대신 동네상권을 넘어 전국적으로 사업 확장이 가능한 고부가가치형 자영업을 권유한다.
이인호 대표는 “선진국의 창업 교육은 규모에 상관없이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기업형 창업에 중점을 둔다”며 “상담사는 주로 친환경농산물유통업, 디자인 회사, 특화된 형태의 가게, 정보기술(IT) 아웃소싱업 등을 권한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sanhkim@donga.com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이병기기자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