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전날 저녁 잘 먹고 느긋하게 잠들었던 관영(瓘영)의 군사들로 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었다. 이제 천하를 다투는 싸움은 끝나고 대세는 결정난 것쯤으로 여겼는데, 한왕(漢王) 유방과 그를 따르는 제후들이 차지하고 있던 팽성 쪽에서 난데없이 초나라 군사가 나타나 엄청난 기세로 덮쳐왔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선두에는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한 패왕 항우가 시퍼런 보검을 빼들고 우레처럼 외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패왕이다. 패왕 항우가 돌아왔다!”
초군의 함성에 관영의 군사들이 놀라 허둥대며 소리쳤다.
놀라기는 관영도 마찬가지였다. 패왕이 제나라에서 출발했다는 풍문은 있었지만, 관영이 헤아리기에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오기에는 너무 일렀다. 또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왔다 해도 관영이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자기들을 덮쳐오는 패왕과 초나라 군사의 함성이 아니라, 그들과 한왕의 20만 대군이 팽성을 두고 벌이는 격전의 소식이었다.
“적에게 속지 말라. 거짓말에 흔들리지 말고 진문을 지켜라!”
겉으로는 그렇게 외치며 갑옷투구를 걸쳤으나 관영의 마음은 이미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런 관영의 명을 차분히 받아들일 사졸이 없어 공들여 세운 한군의 녹각(鹿角)이나 목책(木柵)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내 한군의 진세가 무너지고 초나라 군사가 관영의 진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팽성은 떨어지고 패현 장돌뱅이 유방은 달아났다. 너희가 무엇을 기다리느냐?”
“머지않아 유방의 목 잘린 머리가 올 것이다. 그걸 봐야 항복하겠느냐?”
기세가 오른 초나라 군사들이 그렇게 소리 높이 외쳐 그러지 않아도 허둥거리는 한군들을 더욱 얼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대장인 관영마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간 일이었다.
관영은 사서(史書) 여기저기에서 ‘치열하게 싸워(疾鬪)’ 또는 ‘온 힘을 다해 싸워(戰疾力)’라는 수식구가 특별하게 붙을 만큼 맹렬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장수였다. 적장의 기세가 사나우면 그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맞받아 쳐 전국(戰局)을 돌려놓는 게 그의 장기였는데 그날은 도무지 그 전투력이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초나라 군사들의 거짓 외침을 핑계 삼아 몸을 뺄 궁리부터 먼저 했다.
(우리 대군이 있는 팽성을 두고 그 서쪽에 있는 이 소성부터 먼저 치는 것은 싸움의 이치에 맞지 않다. 저들이 떠드는 대로 팽성은 떨어지고 우리 대왕께서는 낭패를 보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억지로 버텨봤자 무슨 소용인가. 팽성의 30만이 넘는 우리 대군을 무찌르고 온 패왕의 대군에게 맞서 봤자 장졸만 상할 뿐이다. 차라리 서쪽으로 물러나 군사를 수습한 뒤 우리 대왕을 찾아 재기를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조참에게도 그리 전해 우리가 이끈 한군이라도 온전히 보전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정한 뒤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말 위에 뛰어올라 조참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관영은 화경(火鏡) 같은 눈에 불길을 철철 흘리며 앞서 덮쳐오는 패왕과 그 좌우에서 두 날개처럼 패왕을 떠받들고 있는 용저(龍且)와 항타(項타)의 기세에 먼저 질려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