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숭산 큰 스님과 함께 한 현각 스님(오른쪽).사진제공 현각 스님
숭산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15년 전인 198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미국 하버드대 샌더스 시어터(Sanders Theater·하버드대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였다.
강의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강사의 얼굴을 보고 실망했다. 통통하고 키 작은 동양인이 삭발한 머리에 낡은 회색 옷을 걸치고 문법도 잘 맞지 않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무슨 생불(生佛)이라고 이 난리를 피우는 거야.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강의에 빨려 들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같은 철학적인 질문들에 대해 스님은 내가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도 접하지 못했던 간단명료하고 생생한 지혜들을 쏟아냈다.
나는 당시 불교에서 진리를 구하고 있었는데 숭산 스님의 강의는 내 운명을 180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물설고 낯선 땅에서 승려가 되어 한국불교를 포교하고 있으니 말이다.
큰스님은 1, 2년 전부터 편찮으셨다. 입적하시기 며칠 전에도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지난달 30일 오후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들 말에 부랴부랴 병원에서 화계사로 모셨다. 큰스님의 미국인 첫 제자 대봉 스님(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조실)과 내가 앰뷸런스에 함께 탔다.
큰스님의 얼굴은 너무 평온했다. 피부는 아기처럼 고와 주변에 빛을 뿌릴 정도였다. 고른 숨을 내쉬는 스님의 이마에 정중하게 키스했다. 내 입술에 닿는 스님의 피부가 마치 이 세상에는 없는 천사의 것 같았다. 맘속 깊이 스승께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이날 오후 4시 화계사. 주지 스님을 비롯해 가까운 제자들이 함께 모였다. 대광(미국 프로비던스 선원장), 오광(유고슬라비아 스님), 현문(폴란드 스님)과 한국 스님들까지 모두 8명이 무릎 꿇고 둘러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스님의 편안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몸에 의지하지 말라. 우리 모두 모르는 곳에서 왔다가 모르는 곳으로 간다. 오직 모를 뿐이다.”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긴 잠을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큰스님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희생으로 푸른 눈의 우리들을 가르치느라 건강도 챙기시지 못했다.
이제 한국의 정신문화는 숭산 큰스님이라는 용광로에 녹아 미국에서, 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위대한 가르침을 한국인들에게 다시 알리는 일만이 큰스님께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와 정신에 눈뜨게 해 준, 나의 또 다른 아버지나 다름없는 큰스님의 극락왕생을 빈다.
현각 스님·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장
정리=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