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책과 멀지 않게 살아 온 셈이지만, 출판사에 몸담았을 때는 오히려 책과의 알뜰하고 친밀한 만남이 쉽지 않았다. 번역할 책 찾기에 골몰하며 계약에 부심하는 과정에서 정작 책은 내 것이 되지 않고 타자로 남기 일쑤였으니….
이렇게 책 틈에서 삶에 하중이 조금씩 더해 갈 무렵, 일의 패러다임을 바꿔 볼 생각을 했다. 가까운 선후배, 친구들을 모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출판사에도 도움이 되고 각자의 작업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참신한 기획 건들을 발굴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보람 있게 번역할 터전을 만들자는 시도로 작년 9월 돛을 올렸고, 나름대로 순항 중이다. 일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일곱 벗들이 조화롭게 ‘시너지’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공동체의 이름은 ‘사이에’로 정했다. 사람 사이에, 책 사이에, 외국말과 한국말 사이에, 저자와 독자 사이에, 출판사와 독자 사이에…. 이렇게 ‘사이’에 존재하면서 그곳을 제대로 채워주자고 생각했다. 프랑스어로도 ‘사이에(¤a y est!)’, 즉 ‘됐다, 이거다!’라는 좋은 뜻이 됐다.
많고 많은 책 중에 딱 ‘이거다!’ 싶은 것을 찾아내 ‘이거다!’ 싶은 언어로 옮겨 내는, 말로는 쉽지만 실지로는 어렵디 어려운 과정을 이제는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 1년여 지나면서 틀이 잡혀가는 게 느껴진다. 역자든 기획자든 혼자 일하다 보면 적잖은 난관과 고충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새로운 생각이 고갈될 때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함께 격려해 가면서 긍정적 결과를 낳곤 한다. 물론 여기엔 기획자로서, 역자로서 부단한 노력이 전제된다. 독자가 갈구하는 ‘바로 그것’을 찾아 제때 제시하는 능력이 토대가 되어야 하니까.
늘 좋은 책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한 책을 맡게 되면 작업 속도를 늦출 수 없으니, 어쩌면 약초 캐며 등산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할까? 힘든 고비에도 계속 오르는 괴로움이 산꼭대기에 서면 그대로 기쁨이듯, 책과 씨름하며 흘린 땀은 버젓한 번역서로 독자를 만날 때 그 삽상한 바람에 어느새 마르고, 다시 새로운 책을 찾아 나선다.
올 한 해 한 사람이 약 3.5권을 번역했고, 각자 찾아내 소개한 책은 훨씬 많다. 우리의 번역과 기획이 부가가치를 얼마나 남겼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일로써 승부한다는 원칙이 어느 정도는 확립된 것 같다.
때로 책을 고른 기획자와 그것을 추천받은 출판사의 관점이 일치하지 않기도 하고, 꼭 번역하고 싶은 인문서나 예술서가 대중적 호응에 대한 판단 때문에 사장되기도 한다. 독서 대중의 기호에 대한 고려는 필수적이겠지만, 그렇다고 가치 있는 책이 소수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언젠가 꼭 나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는다.
정보의 바다에서 험한 파도를 타고 글밭에서 주경야독하면서도 늘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애정이 가는 일을 생업으로 하기 때문일 게다. 나이가 더 들어도 “사이에(됐다)!”라고 외칠 수 있게 나의 일과 꿈을 하나로 만들어 가고 싶다.
▼약력▼
1958년생.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3대학에서 불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여러 출판사에서 번역서 기획과 해외저작권 업무를 맡았고 지난해 네트워크 ‘사이에’를 만들었다. ‘차문디 언덕을 오르며’ ‘장자수 마을 마옌 이야기’ ‘잠의 제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임희근 출판기획·번역 네트워크 ‘사이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