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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칼럼]동아시아 공동체와 2005년

입력 | 2004-12-01 18:58:00


12월이라면 내게는 두 가지 추억이 겹치는 달이다. 첫 번째는 서독에서 일하게 될 한국 광원의 제1진이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1963년 12월. 두 번째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듬해 서독 국빈 방문 도중 탄광촌으로 한국 광원들을 찾아갔을 때 환영식장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던 1964년 12월.

▼제국주의 수탈겪은 과거 공유▼

서독 광원에 관한 기억이 유난히 내 뇌리에 각인된 까닭은 탄광 노동의 고역을 내가 현지답사를 통해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산이 아니라 들에서 석탄을 캐던 서독의 탄광은 1960년 당시 이미 지하 1000m까지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다시 거미줄같이 얽힌 갱도를 몇 km 뚫고 나가 그 끝에서 채탄을 했다. 3교대로 하루 8시간씩 거의 알몸으로 일하는 동안 1000m의 무게를 못 견뎌 갱도가 무너지거나 수도관이 터지는 사고가 나면 장례식도 없이 땅속 깊숙이 매장되는 탄광 노동은 문자 그대로 죽음의 이웃에서 일하는 중노동이다. 한국 광원이 도착하기 석 달 전 나는 그 갱도를 두세 시간 사전 답사해 본 일이 있다. 그랬더니 그 뒤 1주일 동안 코를 풀면 검댕이 섞여 나왔다. 매일 8시간씩 갱에서 채탄하는 광원들의 허파는 무슨 빛깔을 띠고 있을까 상상하니 소름이 끼쳤다.

당시 서독의 탄광에는 유고, 터키, 그리스의 노동자들이 와서 일하고 있었다. 매일 8시간씩 1000m 지하에서 고역을 치르는 이들 외국인 광원들. 그러나 그들은 일단 일을 마치고 지상에 올라오면 서로 남남이 되어 어울리질 않는다고 안내해 준 탄광회사 간부가 말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말을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그건 나에겐 매우 계몽적인 시사였다.

직장이건 민족이건 무릇 공동체의 성립을 위해서는 우선 운명을 같이하는 ‘경험의 공유’가 전제돼야 하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얘기가 통할 때 비로소 공동체는 성립되는 것이다. ‘커뮤니티’의 성립에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라오스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한국 중국 일본’ 정상회의에서 동남아와 동북아를 아우르는 거대한 ‘동아시아공동체(EAC)’를 건설한다는 화려한 구상이 나왔다. 세계가 유럽연합(EU),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으로 지역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추세 속에서 EAC 구상은 가슴 설레게 하는 소식이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광대하고 정치 경제 인종 종교 문화에서 서로 이질적인 동아시아 각국을 느슨한 대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상호 소통의 언어나마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동아시아에는 공동의 운명, 공통의 경험조차 있는 것일까.

있다. 지난 세기 중엽까지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가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식민지 반(半)식민지로서 수탈과 수모를 겪었다는 공통의 경험이다. 그럼으로써 동아시아 각국은 제국주의 군국주의는 단죄해야 한다는 공통의 언어를 갖고 있다.

유럽공동체의 출발에도 히틀러 전쟁에 시달린 공통의 체험과 그를 단죄하려는 공통의 의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2005년은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원대한 구상을 위해서도 매우 뜻있는 해가 될 것 같다. 내년은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반(反)파시스트 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함으로써 식민지 반식민지의 기반(羈絆)에서 해방된 지 뜻 깊은 갑년(甲年)이 되는 해다. 유럽에서는 1994년에 이어 금년에도 히틀러 전쟁에서 승리의 전기가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60주년을 기념해 독일 총리까지 초청해 성대한 퍼레이드를 베풀었다.

▼해방 60주년 정상회담 개최를▼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발의해서 내년 8월 15일엔 중국의 난징(南京)쯤에서 군국주의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동아시아 제국의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을 간곡히 제안한다. 거기에는 일본 총리도 초청해 야스쿠니신사보다도 난징의 대도살기념비(大屠殺紀念碑) 앞에서 ‘부전(不戰)의 결의’를 다짐하게 해 준다면 그것은 중일 관계만이 아니라 EAC를 지향하는 동아시아 모든 나라를 위해서도 썩 좋은 출발이 되지 않을까.

최정호 객원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