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교습소’의 주인공 민재(윤계상)는 사내아이처럼 털털한 수진(김민정)을 짝사랑하지만 말 한마디 못 건네는 수줍음 많은 소년이다. 사진제공 좋은영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의 고통을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3부작을 통해 90년대 중반이후 한국 여성영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변영주 감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객들에게 늘 친숙함과 낯섦이 교차해왔던 인물이다. ‘낮은 목소리’ 시리즈나 그의 첫 장편 데뷔작 ‘밀애’ 등 그의 영화는 언론의 집중적이고도 호의적인 주목을 끌었지만 대중들의 평가에서는 늘 2% 모자란 면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변영주 자신은 인기를 모았지만 변영주의 영화는 그렇지 못했던 셈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가 영화로 얘기하는 방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고들 한다. 변영주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람들은 그가 영화를 가슴으로 만들기보다는 머리로 만든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는 예컨대 그가 ‘밀애’를 통해 보여준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 같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밀애’는 불륜의 격정과 섬세한 심리 동선을 좇기보다 관계에 대한 논리적 설명과 에피소드를 따라갔다. ‘밀애’의 실패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견된다. 사람들은 대개 생각보다는 느낌으로 영화를 본다.
두 번째 영화 ‘발레교습소’는 변 감독 스스로 그 같은 비판에 대해 얼마나 고민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발레교습소’는 막 수능시험을 끝낸 스무 살 남자의 이야기이자 이제 곧 세상을 받아들이려는,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청춘들의 성장고백서다. 영화는 당연히 줄곧 스무 살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의 풍경을 그려낸다. 왜 변영주는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갔을까. 이 386 세대의 작가는 어쩌면 지난 몇 년간 대중과의 소통에 일정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만들기 이전, 그러니까 자신 역시 대중관객이었던 시절, 그 영화적 초심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공 민재(윤계상)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동갑내기 황보수진(김민정)이란 여학생을 짝사랑하는 평범한 대입수험생이다. 항공기 조종사인 아버지는 민재가 항공학과에 들어가기를 바라지만 그가 받은 수능 점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다. 아버지 몰래 넣은 원서로 조경학과에 합격한 민재는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벌인 뒤 집을 나간다.
변영주 감독
‘발레교습소’는 발레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발레교습은 주인공 민재가 사는 아파트 단지 근처 구청회관에 마련된 문화강좌의 하나일 뿐이다. 이 ‘발레교습소’는 민재와 그의 친구들처럼 세상이 요구하는 질서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걸음 비켜나 있는 사람들의 집합소다. 문화강좌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강좌인 발레교습의 선생이나 수강생들, 곧 중국집 배달원, 비디오 가게 주인,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수산시장에서 집안일을 시작한 민재의 친구, 그리고 무조건 아들 사랑만이 앞서 있는 집안 분위기에서 벗어나 제주도 수의학과에 유학하고 싶어하는 여자친구 등 ‘모자란’ 사람들의 위안의 공간이자 해방공간이다.
배우들이 발레를 전혀 못해도 상관없는 영화라는 감독의 설명에는 이 공간을 통해 그가 보여주려 했던 이야기가 제목과는 180도 다른 것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 속 발레교습소는 변영주가 꿈꾸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커뮤니티 공간이다. 여기엔 그가 의식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영화운동의 이상(理想)이 담겨 있다. 영화 속 발레교습소가 종종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지던 캐릭터들도 이 공간에만 모이면 지나치게 순박해져서 동화 속 인물들처럼 느껴진다. 이 안에만 모이면 계급적 갈등도, 세대적 갈등도, 성적인 갈등도 사라진다.
결국 변영주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춘들의 성장기를 통해 은근슬쩍 새로운 이상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려 한 셈이다. 전술을 바꿨을 뿐 그가 이루고자 하는 영화의 전략적 모토는 여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청춘이 겪는 성장의 격렬한 고통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성장통’과 무관치 않을 수 있다. 이 영화의 성공은 그 두 가지 의미의 접점을 관객들이 올곧이 발견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영화의 흥행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 다음의 문제다. 15세 이상 관람 가. 3일 개봉.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