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아.” “집에 갈래요.” 영화 ‘…ing’에서 여고생 민아(임수정)가 아랫집 대학생 영재(김래원)로부터 예기치 않은 사랑 고백을 듣는 장소는 작고 소박한 근린공원인 서울 성동구 옥수2동 달맞이공원이다(오른쪽 사진). 이곳에 서서 한강을 바라다보노라면 평범했을지언정 소중했던 추억의 편린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장강명 기자
“좋아. 나랑 만날만 해. 인정.”
“어디 감히 그 나이에 나 같은 영계를.”
아랫집 대학생 영재(김래원)와 사진을 찍으러 소풍을 간 여고생 민아(임수정). 능글맞은 영재의 수작에 당당하게 대꾸했지만 “나 너한테 첫눈에 반한 것 같아”라는 말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집에 갈래요”라며 도망쳐 버리고 만다.
이들이 수동 카메라를 들고 풋사랑을 키워가는 곳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숲이 있는 한적한 근린공원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다.
‘시한부 인생과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깔끔하게 소화해 호평을 받은 영화 ‘…ing’(2003년 개봉)에 여러 차례 나오는 이 공원은 서울 성동구 옥수2동에 있는 ‘달맞이공원’(달맞이근린공원·1만4203평)이다.
조금 친해진 민아와 영재는 밤에 달맞이공원을 다시 찾는다. 키우던 애완 거북을 공원에 풀어주고 ‘1234’게임(땅에 선을 긋고 돌을 던진 뒤 한 발로 뛰며 돌을 주워 오는 놀이)을 하면서 민아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했던 과거를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없고, 어릴 때부터 병을 앓아 친구도 없다는 것. 두 사람은 말없이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며 캔 맥주를 마신다.
달맞이공원의 높이는 겨우 해발 80m. 하지만 뚝섬∼한남대교가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한강 쪽이 낭떠러지인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강변북로와 접한 북쪽은 절개면이다. 산을 깎아 만든 스카이라운지인 셈. 바위산 정상부에 있는 공원이라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층에 배드민턴장과 철봉 등 체력단련기구들이 있다.
병이 다 나은 게 아니라 자신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민아는 새벽에 영재를 달맞이공원으로 다시 끌고 와 기념사진을 찍자고 한다.
“지금?”
“응. 나 지금 되게 행복하거든. 이 순간 내가 행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증인이 필요해.”
‘곧 영원히 사라져버릴 잔잔한 일상의 행복’에 대한 소녀의 절실함이 근린공원의 소박한 평온함과 어울려 한없이 짙게 배어난다.
탁월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교통이 불편해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서울지하철 1, 3호선 옥수역 3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강변북로 방향) 길로 1분 정도 걸은 뒤 풍림 아이원아파트 입구를 지나 다시 2분 정도 걸으면 왼쪽에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승용차로는 접근이 어렵다.
순정만화 분위기의 ‘…ing’에는 달맞이공원 외에도 서울 곳곳이 예쁘게 나온다. 영재와 민아가 톡탁이며 정을 쌓는 등굣길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 뒷길, 영재가 졸업사진 전시회를 여는 곳은 종로구 부암동의 환기미술관이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