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又民)이냐, 우민(于民)이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선생의 철학을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다산연구소는 요즘 누리꾼(네티즌)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연구소의 고문인 고건(高建·사진) 전 국무총리의 아호를 지어주기 위해 ‘우민(又民·다시 또 백성일 뿐이다)’과 ‘우민(于民·스스로 민초이면서 민중과 함께한다)’ 중 어느 것으로 하면 좋겠는지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는 것. 우민(又民)은 백성을 중시한다는 선언적 의미가, 우민(于民)은 백성과 함께하겠다는 적극적, 실천적 의미가 강하다.
공직을 떠난 6개월 동안 고 전 총리가 침묵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정치 얘기를 하지도, 정치권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는다. 그는 최근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정치와 관련된 질문이 나오자 이 같은 아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가끔 교보문고에 책을 사러 나오는 것 외에는 정·관가가 있는 광화문이나 여의도 쪽으로 아예 발길을 옮기지 않는다. 공직을 떠난 뒤 공식 행사에 참석한 것은 9월 7, 8일 중국 둔황(敦煌)에서 열린 한중일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한 게 유일하다.
그런 그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호감이 가는 차기 대권주자’로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판별분석 결과에서 수도권과 영호남, 30, 40대에서 호감도가 골고루 높게 나오고 있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심상찮은 ‘고건 현상’과 관련해 리더십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욕구가 달라지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들이 젊음과 패기보다는 중용(中庸)과 경륜의 리더십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탄핵 발의 당시 63일 동안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공백에 대한 국민들의 두려움을 씻어주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평가도 있다.
차기 대선주자군 주변에서도 ‘고건 현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현 정치권에 대한 실망이 고 전 총리에게 단기적으로 투사된 것일 뿐 강력한 지지층이 없어 고공행진을 계속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신문을 꼼꼼히 읽는다. 직접 스크랩도 한다. 다양한 분야의 베스트셀러도 탐독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서다. 테니스와 요가, 단전호흡을 곁들인 반신욕 등으로 건강을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나라가 어려운데 언제까지 침묵만 지킬 것이냐”는 일각의 지적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전언이다. 이에 따라 고 전 총리가 조만간 비(非)정치적 현안에 대해 언론과의 인터뷰가 아닌, 누리꾼과의 e메일 대화 등 간접적 방식으로 입을 열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온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