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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철칼럼]‘등 따습고 배부른 정치’

입력 | 2004-12-08 18:18:00


요즈음 여야의 백병전을 보노라면 ‘정치란 백성의 등은 따뜻하고 배는 부르게 해 주는 것’이란 오래전 원로 정객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김장용 채소 값 폭락으로 밭을 갈아엎어야 하는 농민들에게, 솥단지를 집어던져야 하는 식당 주인들에게 법안 상정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장 등이 시리고, 배가 고픈데 개혁 이름으로 쏟아 붓는 법안에 얼마나 많은 국민이 관심을 갖겠는가. ‘뼈 빠지게 일해도 잘살게 될지 의문’이라는 근로자가 66%나 됐다는 조사결과는 ‘등 따습고 배부른 정치’와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다는 증거다.

▼민생 죽는데 정권은 살까▼

집권세력은 정치의 방향을 크게 잘못 잡고 있다. 개혁하고 나면 다음에 잘살 수 있으니 참으라는 식이지만 당장 가구당 평균 3000만 원의 빚을 안고 있는 민심을 너무 모르는 짓이다. 잿더미 위에 이룩한 급속한 발전을 ‘압축성장’이라고 한다면 밑에 깔린 국민의식도 ‘급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현실적 이해에 민감한 것이 민심이고, 또 빨리 변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개혁이니, 참여니 하는 그럴듯한 말에 끌려 다니는 민심이 아니다.

민생이 정권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했는지는 역대 정권의 부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때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못살겠다. 갈아 보자’였다. 그는 유세 중 사망했으나 민주당은 2년 후 4대 총선에서 대약진했다. 당황한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고, 그것이 정권의 종말이었다. 산업화를 다짐으로써 정통성 약점을 덮어 온 박정희 정권은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민생고로 흉흉해진 민심이 권력 안팎으로 번지는 가운데 비극적으로 끝났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정통성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지녔으나 달러, 유가, 금리의 3저(低)현상에 힘입은 경기 호황을 앞세워 힘겹지만 정통성 공격을 그럭저럭 넘어갔다. 외환위기로 마감된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것은 경제난이 새 정권을 불러들인 대표적인 예다. 이회창 후보는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경제난을 부른 정권의 후속 타자란 점에서 승산이 높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에는 소외감을 자극받은 수도권 서민층의 지지가 적극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지금 집권세력의 고민은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던 서민층의 이반현상이다. 이유는 생활고 때문이다. 그래서 20%대에 머물고 있는 지지율을 높이고 정권도 연장하려는 궁리가 한창인 것 같다. 최근 집권세력과 대선 후 팽(烹)처리했던 민주당 간의 교감이 심상치 않다. 노 대통령은 영국까지 가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정과 정치, 인권 사회복지 역사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고 치켜세웠다. 김 전 대통령은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씨에 대한 사실상의 감형 가능 조치에 매우 감격했고, 이에 화답하듯 병원에서 치료 중인 박 씨에 대한 집권 유력 인사들의 문안도 잦다는 것이다. 집권세력 내 민주계의 결집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민주당이 지난 대선 때 노 후보 당선을 위해 졌던 빚 40억 원도 갚아 준다는 말이 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합당설도 점차 고개를 들고 있다.

▼민주당 다시 껴안는 속셈▼

민주당을 깨고 나갈 때와는 달리, 거꾸로 사정이 급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당 지지기반인 호남 끌어안기다. 정권 연장을 위해선 참으로 낯 뜨거운 일까지 마다않겠다는 것인가. 이것이 개혁인가. 시린 등을 덮어 주고 주린 배를 채워 주는 정직한 길이 힘들다고 쉬운 길로 빠지자는 것이 아닌가. 이런 해괴한 풍토가 통용될 때 정치에 대한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인위적으로 정치구도를 바꿔 보겠다는 것은 해법이 아니라 권력의 오만이다. 생활 형편이 나빠질수록 올라간다는 ‘엥겔계수’가 4년 만에 최고치에 이른 살림을 제쳐 놓고 정권 연장이 가능하리라고 믿는가. 내년 경제성장률도 4%를 넘지 못하고 서민생활은 계속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치’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해답은 ‘등 따습고 배부른 정치’에 있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