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타고 우주에 올라간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웬걸, 2002년 미국의 하이리프트 시스템 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금 57만 달러를 받아 몇 년 안에 궤도 엘리베이터의 건설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궤도 엘리베이터가 완성되면 사람들은 일종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인공위성 궤도까지 ‘그대로’ 올라가게 된다. 덕분에 우주왕복선으로 지구 대기권을 넘나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대폭 줄어든다.
이것은 1979년 아서 클라크가 ‘낙원의 샘’이란 과학소설을 통해 선보일 때만 해도 꿈만 같은 얘기였다. 이 모든 게 지구에서 가장 견고하다는 나노 케이블을 탄생시킨 나노기술의 경이적 발전 덕분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과학소설의 단골 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1968년 SF영화 ‘2001년 우주 오디세이’를 보면 화상전화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휴고 건즈백이 1929년 ‘Ralph 124 C41+’란 과학소설에서 써먹은 소재다. 건즈백이 예견한 시대는 27세기였으니, 오히려 엔지니어들의 솜씨가 작가의 상상력을 뺨치는 수준이다.
흔히 SF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먼 미래에 대한 낭만적인 공상 정도로 치부하곤 한다. 물론 과학소설 장르에서도 작가마다 생각이 제각각이다 보니 별별 작품이 다 나오긴 하지만 SF는 본래 과학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SF 또는 과학소설은 판타지소설과는 달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과 긴밀하게 연관된 이슈를 줄곧 제기해 왔다. 환경 보호, 유전공학, 사이버 공간, 그리고 원자폭탄 같은 것들이 좋은 예다. 심지어는 외계인과의 ‘최초의 접촉’ 같은 황당한 소재조차 때로는 현실의 과학과 서로 끈끈한 애정을 과시하곤 한다.
1980년대 할리우드 영화 ‘제3종의 근접조우’와 ‘ET’는 늘 괴기스럽고 사악한 이미지로만 고정된 외계인 상을 일거에 뒤흔들어 놓은 화제작이었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그런 영감을 불어넣어 준 이가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우주생물학자인 칼 세이건이었다. 영화로 큰 돈을 벌게 된 스필버그는 수익의 일부를 세이건이 몸담고 있는 행성협회에 희사했다. 기부금의 용도는 지적인 외계종족이 사는 별의 전파원을 찾는 것.
또 다른 예를 보자. 아폴로 15호 비행사들은 월면을 탐사하는 한편으로 짬을 내어 특별히 몇 곳을 방문했는데, 그 지명들은 프랭크 허버트의 장편소설 제목인 ‘듄’을 비롯해서 SF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1994년에는 화성 남반구의 쌍둥이 분화구에 유명한 과학소설가인 로버트 앤슨 하인라인의 이름이 붙여졌다.
과학기술과 SF적 상상력은 앞으로 더욱 긴밀하게 연관되며 우리의 고민과 사회 현실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학소설은 하루하루 변하면서 쏜살같이 달리는 과학이란 열차에 타고 있는 인간을 순간 포착해서 카메라로 찍은 다음 인간학적인 해석을 덧붙인 해설판인 셈이다. 그래서 과학소설은 꿈인 동시에 현실이다.
최근 일고 있는 SF영화 붐은 이러한 문화콘텐츠 장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음을 입증한다. 다만 SF 골수팬의 한 사람으로서 작은 바람이 있다면 공포영화제나 판타지 영화제처럼 SF도 하나의 장르로 묶인 ‘콘셉트 영화제’ 형태로 대중과 접하는 길이 열렸으면 하는 것이다.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