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 80년대에 유행하던 도색잡지들. 1980년대 초 대학가에 한두 개씩 자리했던 ‘돌다방’은 포르노를 상영했던 은밀한 문화공간이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우리 세대의 성교육은 중고교 시절 화장실에서 시작됐다. 도색잡지에서 오려 낸 고색창연한 누드사진이 첫 번째 대상이고, 어떤 친구 녀석이 포르노 테이프를 보았다면 그의 영웅담이 두 번째 대상이었다. 그러나 구체적 실체는 없었다. 무용담으로 떠돌아다니는 상상력이 전부였다.
촌놈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처음 오던 날 두 가지 충격을 만났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의 핏빛 사연이 그 하나고, 속칭 ‘돌다방 문화’로 일컬어지는 포르노영화 집단관람이 또 하나였다. 자연스럽게 낮에는 선배들을 따라 시위현장을 따라다녔고, 밤에는 최루탄을 뒤집어쓴 채 삼삼오오 돌다방에 모여 앉아 500원짜리 쓴 커피를 마시며 포르노 영화를 감상했다.
내가 알기로 1980년대 초 전국 대학가에는 돌다방이 한두 개씩 자리했다. 동시상영관 극장이 건전한 예술 공간이었다면, 포르노상영관인 돌다방은 은밀한 문화공간이었다. 돌다방은 대개 후미진 뒷골목의 지하 어딘가에 자리했다.
내가 자주 애용했던 돌다방은 서울 제기동 시장골목 어딘가로 기억한다. 색이 바랜 간판은 희미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녹슨 셔터소리는 기억이 생생하다. 밤새도록 뿜어 댄 담배연기에 얼굴은 누렇게 떠 있고, 온갖 야릿한 상상력으로 비틀어대던 눈알은 벌겋게 달아 있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막걸리 선술집 고모집을 찾아 들어서면, “이놈의 새끼들 밤새도록 술 처먹고 어디 가서 무슨 짓을 하다 온 거야?” 하는 고모의 욕지거리가 면상을 후려친다. 고향 부모님 신세타령을 선술집 고모에게서 대신 들으며 따뜻한 해장국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눈곱을 떼어내고, 학생회관 동아리방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술 냄새가 진동하고, 한두 명이 이미 ‘시체’처럼 널브러져 자고 있다. 강의를 챙겨 들으려는 생각은 애초에 없다. 오후 세미나 시간에 선배에게서 혼나지 않으려면 책부터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과학과 철학은 여기서 마스터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혁명의 꿈도 여기서 키웠다.
지금 인터넷 시대는 포르노 천국이다. 옳고 그름의 가치문제를 떠나 세상은 많이 변했고, 뒷골목 문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추억하는 우리 세대의 뒷골목 문화에는 꿈과 낭만이 있었다. 혼자 골방에서 포르노를 감상하는 일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다. 돌다방에서 집단의식을 치르거나, 친구들과 모여서 여관방을 함께 뒹굴며 희희낙락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혁명을 꿈꾸었고, 아름다운 사랑을 열망했다. 돌다방의 문화체험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대개 대학교 초년생 때 지나가는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고학년이 되면서 치열한 투쟁가로 변해갔고, 낭만을 점차 상실해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번은 그때 동고동락했던 친구들과 제기동 뒷골목을 다시 찾았다. 우리들의 대모였던 고모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재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곳에서 우리들은 추억을 되새길 만한
공간을 찾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왔다.
돌다방 포르노그래피! 우리들의 작은 천국이었다.
○ 이승재씨는?
△1964년 생 △고려대 철학과 졸업 △2000년 엘제이(LJ)필름 설립 △‘수취인불명’(2000년) ‘나쁜 남자’(2001년) ‘해안선’(2002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년·청룡영화상 작품상 수상) ‘주홍글씨’ ‘여자, 정혜’(2004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