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살 수 있겠냐.” “어젯밤 술이 덜 깼군.” “네 나이가 몇인데….”
주변으로부터 이런 빈정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남은 내 인생의 형식, 삶의 또 다른 가치와 관련해 매우 심각하고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인류가 흥분과 기대 속에 새 밀레니엄을 맞던 그해 말 나는 난생처음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대학 졸업 후 10년을 줄곧 잡지와 책 만드는 일에 몸담아 왔다. 서른 중반을 넘어설 무렵 아프리카 미술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인생의 항로를 수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아프리카를 헤매고 다니는 일이 잦아졌다. 아프리카의 부족미술을 찾아다니는 힘든 여정이었다. 내 계획은 아프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을 현대적인 양식으로 재현해내고 있는 미술작품들을 국내에 본격 소개하는 것이었다. 20세기 현대미술의 정신적 원천이던 아프리카. 현장에서 확인한 아프리카의 탁월한 조형감각과 풍부한 미적 자산은 놀라웠다. 작가들의 작업장을 뒤지고 다니다 빼어난 작품을 만날 때의 흥분이란 말 그대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마 오래전 피카소도 그랬을 것이다.
아프리카에는 전통적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은 없다. 예술이 일상의 일부로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그런 ‘전통예술’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쉬고 있는 현대미술, 다만 그것이 아프리카의 문화적 전통의 연장에서 이뤄지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현대미술이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로 유명해진 광고가 있었다. 그 카피에서 ‘사랑’을 ‘문화’로 대체해보면 어떨까. 맞다. 문화는 움직이는 거다. 고여 있지 않고 늘 흐르는 것, 유연하고 도도하고 장엄하게, 더러는 바위에 부딪히고 격랑을 만들며 거칠게, 다만 끊임없이 흐르는 것. 이게 내 문화 인식의 골간이자 시를 써 오면서 가슴에 새겨 온 말이다.
그 흐름의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 ‘충돌’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프리카의 미술을 국내에 반입해 충돌시켜 보고 싶었던 것이다. 미술이 언어와 문자라는 소통 장치를 통과하지 않고 시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그 충돌의 반응에서 나는 쾌감과 에너지를 동시에 얻는다. 2001년 아프리카 현대 조형미술을 처음으로 소개했던 ‘아프리카 쇼나 현대 조각전’은 첫 시도치고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 이후 아프리카 현대미술 전문화랑을 열긴 했지만 그것도 엄연한 사업인지라 쉽진 않았다. 그러나 정말 참기 힘든 건 아프리카에서 무슨 노다지라도 터진 양 여기는 업자들을 상대하며 착잡함을 견뎌내야 하는 일이었다.
지난봄에도 아프리카를 헤매고 다녔다. 부시맨 작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성과들을 모아 지난여름 ‘시원으로의 여행전’을 치렀다. 힘들게 준비한 전시였던 만큼 이제 시간 좀 가져봐야지 했더니 그새 일이 하나 더 늘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출판 일을 겸하게 된 것이다. 나와 일과의 인연은 고래 힘줄보다 질기다. 창틈으로 파고드는 바깥바람 매섭다 싶으니 문득 아프리카가 그리워진다. 곧 나는 또 아프리카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약력▼
1965년생. 추계예술대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9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내 안의 열대우림’이 있다.
정해종 시인·갤러리 터치아프리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