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보행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딸과 함께 뛰어 건너던 중 신호등이 그만 빨간 불로 바뀌었습니다. 승용차가 달려 나왔고 손 쓸 틈도 없었죠.”
국내 최초로 ‘단일등면 디지털 보행신호등’을 개발한 티티엘컴 박태영(朴泰榮·41·사진) 사장은 지금도 1998년 8월을 떠올리면 괴롭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큰딸과 집 근처 산에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은 지금도 왼쪽 다리를 절고 있다.
박 사장은 그 사고 후 남은 보행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숫자로 표시해주는 신호등을 개발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대우통신에 전자부품 납품 사업을 하고 있었던 만큼 제품 개발에 자신도 있었다.
신제품 개발은 ‘아이디어’의 문제였지 기술적으로 크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박 사장은 1998년 말 하나의 신호등면에 적색과 녹색 표시는 물론이고 남은 보행 시간까지 숫자로 표시해 주는 보행신호등 개발에 성공했다. 기존 신호등에 비해 설치비 및 유지비도 절반 이상 줄였다.
하지만 경찰청이 2000년 일부 지역에서 시작한 제품 테스트는 올해 4월에야 끝났다. 신호등에만 매달려 있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그동안 신문 배달원과 보험설계사로 나섰다. 자금이 모자라 살고 있던 아파트도 처분해야 했다.
경찰청은 마침내 올해 7월 20일, 국내 보행신호등을 내년부터 점진적으로 박 사장의 제품으로 교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날 밤 그의 가족은 오전 2시까지 부둥켜안고 울었다.
박 사장은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 가장 먼저 새 신호등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박 사장의 제품은 이제 중국 칭다오(靑島)시 등 해외시장 진출도 눈앞에 두고 있다.
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