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반 리 교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의 에릭 반 리 교수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삼상회의)에서 소련이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합의해 준 것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의 ‘뛰어난 사기술(Master Stroke of Deception)’이라고 규정했다. 권위 있는 스탈린 연구가인 그는 1988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가 열린) 1945년 12월 이미 한반도 통일 가능성은 물 건너갔고 분단구도가 고착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과 달리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있던 소련이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속내를 숨긴 채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오히려 신탁통치를 무산시켰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암스테르담대 연구실에서 에릭 반 리 교수를 만나봤다.》
―유럽에서 왜 한국의 광복 직후 역사를 연구했는지 궁금하다.
“한국의 역사를 연구한 게 아니다. 공산주의를 연구하다 보니 스탈린에 관심이 갔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에서의 스탈린 정책에 돋보기를 들이대게 됐다.”
―박사학위 논문에서 소련은 내심 한반도 신탁통치를 원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물론이다. 1980년대 말 소련 국가문서보관소의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스탈린 시대의 많은 비밀이 드러났다. 스탈린은 미군보다 먼저 진주한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소련군은 38도선 이북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그것은 한반도의 절반이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은 4개국 신탁통치에 의해 한반도에서 자신의 파워가 4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도 소련이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결정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결정문에 따르면 미-소 공동위원회의 합의가 없으면 한국에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도,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소련이 합의해 주지 않으면 어느 것도 할 수 없게 돼 있다. 소련은 언제든지 ‘임시정부 구성이 안 돼서 신탁통치를 실시하지 못했다’고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고 있었던 셈이다. 몰로토프는 그걸 노렸다. 반대로, 몰로토프가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끝내 반대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협상이 결렬됐다면 미국은 당연히 미국에 우호적인 임시정부를 구성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련이 점령한 북한까지 흔들렸을 것이다.”
―‘몰로토프의 뛰어난 사기술’이란 표현이 이해가 된다. 3국 외무장관회의는 몰로토프의 외교적 승리였나.
“엄밀히 말하면 스탈린의 승리다. 공개된 소련 비밀문서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대화, 국제회의에 참석한 몰로토프와 스탈린이 주고받은 전문 등을 살펴보면 몰로토프는 스탈린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몰로토프는 단 한번도 스탈린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탁운동이 없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까.
“어떤 경우든 신탁통치는 없었을 것이다. 소련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자고 해놓고, 내부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굳히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단언하는 근거는….
“모든 문서와 정황이 그것을 말해준다. 소련군은 북한 진주 이후 남북한 경제물자교류를 위한 미군의 대화 제의를 모두 거부했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는 제의도 교묘하게 거절했다. 소련군은 오히려 38선 경비를 강화해 북한을 봉쇄하려 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장교들은 부인을 불러오고 살 집을 수리하는 등 처음부터 북한에 장기 거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미국은 소련보다는 통일에 우호적이었다. 남북한 경제의 통합을 위해 통일이 필요하다고 봤다. 미국의 뜻대로 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됐다면 통일의 기회가 있었을지 모른다. 반면 소련은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미국에 끌려갈 것을 우려했다. 즉, 소련은 남북한 총선거가 실시되면 모두 잃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국 외무장관회의 이후 소련의 의도대로 분단이 굳어지는 상황에서 미국도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다.”
―미국과 소련 중 한반도 분단에 책임이 더 큰 쪽은….
“소련이다. 소련은 처음부터 의도를 갖고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소련에 속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소련이 언제부터 그런 의도를 가졌다고 보는가.
“소련은 38선이 그어질 때부터 한반도 전체를 가질 수 없다면 절반이라도 가지려고 했다. 따라서 3국 외무장관회의가 열렸을 때는 기술적으로 한반도 통일이 불가능한 시점이었다.”
▼에릭 반 리 교수 논문요약▼
蘇사기극 주역 몰로토프 장관
비아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미-소 공동위원회의 합의가 없으면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제의해 관철했다. 이는 한반도 분단을 굳히려는 스탈린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다음은 에릭 반 리 교수의 논문 ‘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한국에서의 스탈린 정책, 1945∼1947’ 중 ‘모스크바와 모스크바회의’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연합군사령관 맥아더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의 무관을 통해 남북한에 진주한 미군과 소련군이 연락장교를 교환하자고 소련 측에 제의했다. 이에 따라 9월 25일 소련군 연락장교단이 서울에 도착했다. 9월 말에는 미군 연락장교단이 평양에 들어갔다.
10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소련군 제25군 사령부 회의에 참석한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가 25군 사령관 치스치아코프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 편지에서 치스치아코프는 “서울에 연락관을 두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다음날 소련군 연락장교단이 서울에서 철수했다. 그로부터 4일 뒤 미군 연락장교단도 평양을 떠나야 했다.
치스치아코프는 남북한 경제물자 교류를 위해 대화를 하자는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요청도 거부했다. 이는 명백히 북한을 봉쇄하려는 의도였다. 소련군은 북한을 자신들의 완전한 통제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미국 구경꾼(American lookers-on)’을 원치 않았고 한국의 통일도 원치 않았다. 한국이 통일된다면 수도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소련의 남한에 대한 영향력보다 클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는 12월 16일 열렸고, 다음날인 17일 한반도 문제에 관한 미국 측 제안을 담은 문서가 배포됐다. 이에 소련 측이 20일 수정안을 제출하자 미 국무장관 번즈가 즉각 동의했다. 번즈는 소련 측 수정안에 두 군데 손을 대기는 했으나 너무 사소한 것이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의 결정은 약간의 자구 수정을 거쳐) 소련 측 수정안이 사실상 관철된 것이다.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단순히 신탁통치안에 반대만 했다면 협상은 깨졌을 것이다. 그 경우 미국은 한국인이 지지하는 임시정부 구성을 지원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미국의 영향 아래 있는 통일정부가 서울에 들어서 북한지역까지 힘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으로서는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몰로토프는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신탁통치를 할 의사가 없으면서도 미국 제안을 받아들이는 척한 것이다. 그는 냉정하고 교활한 외교관이었다. 모스크바 합의는 철저히 대칭적이었다. 소련이 한국의 통일을 저지할 수 있다면 미국도 그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굳이 통일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에릭 반 리 교수는▼
1953년 출생(51세)
197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졸업(대학 때부터 1981년까지 네덜란드 마오이스트 그룹에서 활동)
1988년 암스테르담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0년 암스테르담대 ‘러시아와 동유럽 연구소’ 교수로 임용됨(연구의 초점은 스탈린과 스탈린주의, 스탈린의 대내외 정책)
▽‘소련 정치국의 부상과 몰락’ (1992)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적 사고’(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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