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달라졌다? 의문부호를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은 무릇 인간의 사고(思考)체계란 쉽사리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수 국민이 대통령이 달라지길 원하고 있다면 대통령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주의국가에서 대통령이란 국민의 으뜸가는 공복(公僕)이 아닌가.
노 대통령과 홍석현(洪錫炫) 주미대사 내정자의 조합은 ‘파격(破格)’이다. 파격에는 신선함과 일탈(逸脫)의 양면성이 존재한다. 신선함의 시각에는 노 대통령의 긍정적 변신(變身)에 대한 기대가 실려 있다. 이른바 비주류 코드의식에서 벗어나 인식의 틀이 넓어진 실용주의적 인선(人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일탈의 시각은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의문은 노 대통령의 핵심지지자들을 괴롭게 할 것이다.
▼‘盧-洪조합’ 변화의 시그널인가▼
지난 2년 동안 노 정권이 추구해 온 정치적 목표는 한국사회 주류 기득권세력의 교체였다. 친일파의 자식들이 3대(代)를 떵떵거리고, 독재 권력에 빌붙어온 세력이 여전히 사회의 주류를 이뤄서야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된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진정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비록 갈등과 혼란이 이어지고 경제가 어렵더라도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 이런 혁명적 열정이 노 정권을 이끈 동력(動力)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홍 내정자는 그런 맥락에서 분명 ‘파격’의 인물이다. 내각의 몇몇 테크노크라트(전문 관료)들과는 상징성 면에서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한국 최고의 기업그룹인 삼성가(家)와의 관계나 유력 ‘보수신문’의 사주(社主)이자 국내외 언론계에 큰 명함을 가진 인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신(新)정경유착(政經癒着), 신권언(權言)유착의 우려 섞인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현실화되지 않은 추정에 근거한 비판보다 현시점에서 주목되는 것은 ‘노(盧)-홍(洪)의 파격조합’이 변화하는 대통령의 구체적 시그널이냐는 점이다. 그러려면 파격의 주체도 노 대통령이어야 한다. 그래서 분명히 달라졌다는 인식을 국민에게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가치 지향적 정체성보다 현실적인 중요도를 지닌다.
노 정권의 지난 2년은 실패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급하고 서투른 ‘세상 바꾸기’에 매달리면서 사회공동체는 적대(敵對)로 분열됐다. 생산성 없는 개혁 만능주의에 함몰된 가운데 대중의 삶은 피폐화됐다.
보다 치명적인 것은 희망의 부재(不在)다. 지난날 슬픔도 힘이 된다는 시절이 있었다지만 이제는 아니다. 희망만이 힘이 된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권력은 그 어떤 개혁의 명분이나 과거 청산의 상징조작으로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20%대로 추락한 정권지지도가 그것을 웅변하고 있지 않는가. 이대로 노 정권의 남은 임기 3년이 계속될 수도 없고, 계속되어서도 안 된다. 국민이 대통령의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위기감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내년이면 광복 60주년이다. 1905년 을사조약을 기점으로 치면 일제(日帝)의 침탈로부터는 어느덧 1세기가 지났다. 그런데도 현 정권은 대대적으로 친일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겠다고 한다. 당사자들은 다 가고 없는데 후손(後孫)들이 곤욕을 치를 판이다.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다. 징죄(懲罪)의 단절로는 대화의 교훈을 얻을 수 없다.
▼미심쩍은 의문부호 떼어내야▼
과거사 청산도 그렇다. 크게 보면 우리의 현대사 자체가 한 걸음씩 과거를 청산해 온 과정이 아니던가. 식민지에서 광복, 분단하의 근대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을 거치며 힘겹게 여기까지 왔다는 넓은 인식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것은 반성하고 정리하되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이 서로의 공로를 인정하고 허물은 함께 덮으려고 노력할 때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려면 대통령부터 달라져야 한다. ‘노-홍 파격 조합’에서 그 단서를 찾으려는 안간힘의 이유다. 미심쩍은 의문부호는 떼어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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