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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기현]독살

입력 | 2004-12-22 18:03:00


러시아 권력의 중심인 크렘린 궁은 ‘시신들의 집’이기도 하다. 크렘린 궁 앞 붉은 광장에는 볼셰비키혁명 지도자 레닌의 미라가 누워있고 궁 안 여기저기에는 제정 러시아 귀족들의 유골이 안치돼 있다. 최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과학자들이 이들의 유골을 분석한 결과 몇몇 유골에서 수은 납 비소 등 중금속이 발견됐다. 이들이 치열한 궁중 암투 중에 독살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실제로 1000여 년 동안 크렘린 궁 안팎에서는 수많은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 제정시대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소련 이후 현대사에서도 독살은 경쟁자나 정적을 ‘조용히’ 제거하는 수단으로 빈번히 사용됐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인 작가 막심 고리키가 당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지시로 독살됐다는 설은 오늘날에는 거의 사실로 굳어졌다. 무자비한 지도자의 대명사였던 스탈린마저 자신의 오른팔이던 비밀경찰 총수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독살됐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독살은 권력 투쟁의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냉전시대 치열했던 첩보전에도 사용됐다. 악명 높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장성 출신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올레그 칼루긴은 “우리는 당시 독극물을 ‘공작’에 일상적으로 사용했다”고 증언했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2년 전 러시아 당국은 체첸 반군 지도자 에미르 하타프를 제거했다. 독살이었다. 이에 맞서 체첸 반군도 친러시아 정부 총리 독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독살은 우리 역사 속에도 있다. ‘개혁 군주’ 정조가 수구세력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독살의 가해자는 늘 사실을 숨기려 한다. 비열한 독살의 음모가 드러나면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됐다는 소문이 3·1운동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최근 대통령 선거전 중에 독극물에 중독된 우크라이나 야당의 빅토르 유셴코 후보는 영화배우같이 잘 생긴 얼굴을 잃었지만 그 대신 민심을 얻었다. 26일 다시 치러질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가 독극물로 정적을 제거하고 역사의 흐름을 바꿔보려는 세력에 대한 역사의 경고가 될 것인가.

모스크바=김기현 특파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