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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2004뉴스]중국의 고구려史 강탈

입력 | 2004-12-24 18:10:00

주몽이 中소수민족의 왕?중국 랴오닝성 환런시 오녀산성(홀본성) 앞에 등장한 고구려사를 왜곡한 관광기념품.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의 왕이라는 내용이 중국어와 한글로 새겨져 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1300여 년 전 멸망한 고구려가 부활한 한 해였다. 그것은 대륙을 호령하던 우렁찬 기상의 부활이 아니었다. 옛 고구려의 땅 만주 벌판을 떠돌며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회한의 부활이었다. 중국이 2002년부터 시작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 역사의 이름표에서 한국을 지우고 중국이라는 이름을 써 넣으려는 ‘역사 침공’을 노골화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들끓는 국내 여론을 등에 업고 중국으로부터 간신히 현 상황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겠다는 ‘5개항 합의’를 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중국 측이 역사 침공을 통해 확보한 영역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휴전’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역사안보 불안은 현재진행형이다.》

▽치고 빠진 중국의 이중성=중국은 2003년 말 ‘동북공정’의 실상이 한국 내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여론이 악화되자 2월 왕이(王毅) 외교부 부부장을 파견했다. 왕 부부장은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나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 관계를 손상하지 않도록 정치문제화하지 말고 학술회의를 통해 해결하자”고 합의했다.

그러나 7월 1일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나란히 등재된 뒤 중국은 이런 합의를 교묘하게 깨는 일련의 조치를 단행했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역사 중 고구려 부분을 삭제한 사실이 7월 8일 본보 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민간 학계의 주장일 뿐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중국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것이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중국 정부에 항의했다. 중국은 한국 내 여론악화를 의식해 왕 부부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우다웨이(武大偉) 아시아담당 부부장을 8월 22일 극비리에 한국에 파견해 구두로 5개항에 합의했다. 합의 골자는 △고구려사 문제가 양국간 중대 현안이 된 데 대해 중국 측이 유념한다 △역사 문제로 인한 양국 우호관계 손상을 방지한다 △협력관계의 큰 틀에서 고구려사 문제의 공정한 해결 및 정치화를 방지한다 △중국 정부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해 간다 △학술교류를 조속히 실시한다 였다. 그러나 이는 2월 한중 합의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분노한 국민
중국이 한중간 합의를 어기고 정부 차원에서 고구려사 왜곡을 진행한 것이 뒤늦게 알려진 뒤 분노한 우리 국민들은 곳곳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8월 27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고구려사 왜곡 항의 집회. -동아일보 자료 사진

게다가 이미 중국 정부 차원의 고구려사 왜곡은 사실상 교과서 개정만 빼고는 다 진행된 뒤였다. 고구려 문화유적 기념우표를 발행했고, 해외 180여 개국에 배포되는 중국 문화부 산하 관영지는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권”이라고 단정해 보도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소개하는 관광책자를 펴낸 것은 물론 고구려의 국내성터인 중국 지안(集安) 시에서는 아예 고구려를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내용을 담은 ‘지안 시민수책(市民手冊)’을 각급 호텔과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비치하도록 했다. 지안박물관과 오녀산성사적진열관은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소개하는 역사 왜곡 교육장으로 탈바꿈했다.

▽무비유환(無備有患)을 자초한 한국=동북공정의 실상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중국의 대대적 역사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역사 천리장성’을 쌓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정부도 100억 원의 기금을 내놓겠다고 호응했다. 그렇게 해서 기금도, 연구 공간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연구재단’이 출범했다. 그러나 예산은 처음 약속의 절반인 50억 원으로 줄었고 연구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100여 일을 허송한 끝에 6월에야 고구려연구재단이 문을 열었다.

정부는 2월 방한했던 중국 왕 부부장과의 합의만 믿고 안이하게 대응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기대심리 때문에 고구려사 문제를 되도록 외교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자기최면도 한몫했다. 정부는 뒤늦게 ‘주중 대사 소환’과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돼 있다’는 엄포성 발언으로 5개항 합의를 이끌어낸 뒤 중국이 한발 물러났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중국 측이 2월의 합의사항 위반에 대해 원상회복 조치를 취한 것은 거의 없다. 논란이 된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는 아예 광복 이전의 한국사 전체를 삭제해 버렸다. 있다면 중국 교육부 직속의 최대 교과서출판사인 런민(人民)교육출판사가 9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소개했던 내용을 삭제한 정도다. 그러나 이는 8월 한중간 암묵적으로 합의한 중국 역사교과서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마지노선을 지킨 조치에 불과하다.

정치권의 관심도 반짝 대응에 그쳤다. 국회는 8월 24일 여야 만장일치로 ‘고구려사 왜곡대책특위 구성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넉 달이 지나도록 위원장 자리를 놓고 여야간 씨름을 하느라 특위는 구성조차 못한 채 해를 넘기게 됐다.

고구려연구회를 10년간 이끌었던 서길수(徐吉洙) 서경대 교수는 “중국은 침략전쟁을 도발해 수도권만 빼놓고 다른 지역을 다 점령한 뒤 철군은 하지 않은 채 휴전에 응한 것과 같다”면서 “현재 상황에 안도하지 말고 총력전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中일각 자성론…학계 결집된 대응 필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알려진 직후 학계 비판의 초점은 정부의 안이한 대응에 모아졌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의 대응 노력에도 허술한 측면이 많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먼저 고구려연구재단이 출범하기 직전까지 국내 학계에서는 우리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점검하지 않았다.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는 학자들은 고구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학자가 14명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대대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본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언론은 이런 학계의 주장을 대서특필하며 정부의 지원을 촉구했다.

그러나 서길수 서경대 교수(전 고구려연구회 회장)는 10월 학술회의에서 고구려사 전공자가 오히려 중국은 박사 2명, 석사 12명으로 14명에 불과한 반면 한국은 박사 32명, 석사 198명으로 230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백제에 대한 국내 박사가 28명이란 점과 비교해 봐도 국내의 연구역량은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국내 학계의 연구역량 부족이 아니라 이를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예로 고구려연구회가 6월 28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한 데 이어 고구려연구재단이 9월 16일 같은 주제로 다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국내 학계의 대응이 지나치게 민족주의 코드에 사로잡혔다는 지적도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다. 국내 역사학자와 중국학 연구자들은 중국의 역사왜곡을 중화민족주의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식의 우리 민족주의의 과잉 요소도 되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중국 내부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상하이(上海)의 문화평론가 주다커(朱大可) 씨나 박문일(朴文一) 중국 연변대 전 총장 등은 과거의 역사를 현재에 뜯어 맞추는 중국 정부의 행태를 비판하고 나섰다. 중국의 누리꾼(네티즌)들은 현재의 중국 국경선을 확립한 청(淸)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마다정(馬大正)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주임의 논리를 성토하는 분위기다.

중국 정부의 고구려사 왜곡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국내 학계의 역량을 총결집해야 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