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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그때 그시절엔]출판인 이갑수씨의 '헌책방 추억'

입력 | 2004-12-26 18:50:00

과거의 헌책방 거리. ‘묵은 책들의 향을 흠뻑 몸에 적시고 나오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그 거리’는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처지를 바꾸어 남을 헤아려 본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내 몸을 쪼였다가 튕겨 나간 빛을 구부려 나를 다시 바라본다는 회광반조(廻光返照).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들이다. 그러나 그냥 좋아하는 것을 넘어 나를 변화시킨 네 글자가 있다. 꿈꿀 권리. 물론 나는 이것을 꿈속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만난 책 제목이었다. 이 네 글자는 그야말로 내 눈알을 뚫고 가슴에 꽂혔다.

나는 이 말이 방아쇠가 되어 전혀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호프집 문지방이나 뻔질나게 드나드는 것밖에 몰랐던 발걸음이 헌책방을 익숙하게 찾아들게 된 것이다. 요즈음엔 거의 사라졌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웬만한 곳에선 헌책방이 쉽게 눈에 띄었다.

주말이면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도 가 보긴 했지만 정작 내 마음이 포식을 한 곳은 암사동 사거리였다. 지금은 전망 하나 없는 지하철 8호선이 씩씩거리며 달려드는 곳이지만 그때엔 제법 규모가 큰 헌책방이 두 군데나 들어서 있었다. 퇴근하면서 자연스레 지나는 곳이라 일주일에 서너 번은 꼭 그곳을 들렀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요령도 생겼다. 내가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첫째 기준은 출판사를 보는 것이었다. 신뢰할 만한 출판사 명단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작성되었다.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출판사는 이름도 낭만스러운 일월서각(日月書閣)이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웬만하면 다 내 차지였다. 한문 원전을 별책부록으로 꾸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구입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또 하나 생각나는 헌책방이 있다. 정부과천청사 입구에 있는 것으로, 넝마대장으로 유명한 윤팔병 씨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분위기부터 여느 헌책방과는 달랐다. 주인장의 호탕한 기운이 칸칸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커피라도 한잔 얻어 마시면서 묵은 책들의 향을 흠뻑 몸에 적시고 나오면 기분이 참 좋았다.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이가림 옮김, 열화당 발행. 이 책을 나는 읽어내지 못했다. ‘가방끈’도 짧았지만 ‘머리끈’은 더욱 형편없이 짧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아니 이 제목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심대히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요즘 내가 너무 돈벌 궁리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라치면 한번씩 중얼거려 본다. 꿈꿀 권리!

궁리출판사 대표 이갑수

○ 이갑수 씨는?

△1959년 경남 거창 출생 △서울대 식물학과 졸업 △민음사 편집국장, 사이언스북스 대표 역임 △현재 궁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