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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 밀물과 썰물

입력 | 2004-12-29 17:46:00

그림 박순철


한신의 말을 겨우 알아들은 사졸 몇이 창칼을 꼬나 잡으며 주위로 몰려들었다. 한신이 피 묻은 칼을 높이 쳐들며 한 번 더 외쳤다.

“이제 너희가 살길은 하나, 되돌아서서 죽기로 싸우는 것뿐이다. 죽기로 싸워 살길을 앗고자 한다면 모두 나를 따르라!”

그러자 더 많은 한군이 한신 주위로 몰렸다. 한신은 그들을 이끌고 급한 대로 가장 앞서 오는 한 갈래의 초나라 군사를 들이쳤다. 한군의 갑절은 되는 초나라 군사들이었으나, 공포와 절망이 무서운 생존의 열망으로 전환되면서 짜낸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여지없이 무너져 저희 편이 있는 곳으로 쫓겨갔다.

그러자 더 많은 한군이 살길을 찾아 한신 주위로 몰려들었다. 한신은 그들을 이끌고 앞을 막는 초나라 군사들을 쳐부수며 수수(휴水)를 따라 북쪽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한나절이 지나서야 이른 작은 나루에서 배 몇 척을 얻어 겨우 수수를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한신을 따라 수수를 건넌 사람은 겨우 1000여 명이었다. 그 밖에 용케 목숨을 건져 달아난 군사도 3만을 넘지 못해 영벽 동쪽 벌판에 진을 쳤던 한군 15만은 거의가 수수 가에서 죽었다. 그중에서도 10여만은 모두 수수에 빠져 죽어 그 시체로 강물이 흐르지 않을 지경이었다(卒十餘萬人皆入휴水 水爲之不流)고 한다.

처음부터 영벽의 싸움을 이끌어온 대장군 한신으로 보면 너무도 참담한 패배였다. 그러나 한신도 그 싸움에서 얻은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공포와 절망도 잘 통제되고 조직되면 무서운 힘으로 전환될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일이 그랬다. 이는 나중에 배수진(背水陣)이란 형태로 다듬어져 한신으로 하여금 병가(兵家)로서의 명성을 일세에 떨치게 해 준다.

그런데 한 가지 여기서 다시 따져볼 일은 수수 싸움을 기록하는 사서(史書)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는 곡수 사수의 싸움과 아울러 수수의 싸움도 별개로 올라 있다. 그러나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곡수와 사수의 싸움이 빠져 있다. ‘한서(漢書)’도 그와 같은 ‘사기’의 예를 따라 항적전(項籍傳)에는 수수와 곡수 싸움이 들어 있고, 고제기(高帝紀)에는 그 싸움이 빠져 있다. 그리고 ‘자치통감’에는 두 싸움이 모두 기록되어 있으나 주(注)를 통해 곡수가 곧 수수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뒤의 두 사서가 모두 ‘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한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가장 늦게 편찬된 ‘자치통감’을 편찬한 사마광(司馬光)은 ‘사기’의 기록에 의문을 품었음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수경(水經)’ 같은 다른 저서의 주를 빌려 곡수가 곧 수수임을 밝힘으로써 슬며시 그 의문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실(史實)에 엄밀했다는 사마천은 왜 ‘사기’에다 그렇게 이중적인 기록을 남겼을까. 아마도 사마천은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를 각기 달리 떠받드는 두 갈래의 구전(口傳)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고조본기를 쓸 때는 고조의 참담한 패전을 되도록이면 축소해 얘기하는 구전을 채택하고, 항우본기에서는 항우의 무용(武勇)을 화려하게 과장한 구전을 선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이 어딘가 비슷하고 물에 빠져 죽은 군사가 양쪽 모두 똑같이 십여만 인(十餘萬人)인 것, 그리고 ‘자치통감’의 주 같은 것들로 미루어 그 싸움은 같은 싸움을 두 가지로 꾸며 얘기한 듯한 의심을 버릴 수가 없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