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지진해일로 인한 사망자가 10만 명을 훨씬 넘어섰다.
언론을 통해 ‘아시아의 비극’을 접한 사람도 놀랐지만 구사일생으로 현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에 비할 수는 없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쩌면 평생 이번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파도가 약간만 높아도 기겁한다거나 아예 바닷가 근처에 얼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라고 부른다. 생명을 위협할 만한 큰 사고를 경험한 후 악몽과 공포에 시달리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정상생활을 하기 힘든 정신장애다.
얼마 전 서울백병원 신경정신과 우종민 교수는 지하철과 열차 기관사를 대상으로 PTSD를 조사했다. 사고를 경험했던 기관사의 14%가 심각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자신이 사고의 피해자였다면 PTSD는 더욱 심각해진다. 대구지하철 참사 생존자 1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0%가 PTSD를 겪고 있다는 잠정 연구결과도 있다. 이 연구는 몇 달 후 공개될 예정이다.
성모병원 신경정신과 채정호 교수가 PTSD를 겪고 있는 40대 남녀 27명의 뇌파를 분석한 적이 있다.
그 결과 PTSD 환자일수록 고도의 인지기능을 담당하는 이마엽(전두엽) 부위의 뇌파가 정상인보다 훨씬 단조로웠다. 반면 공포감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뇌파는 매우 복잡했다. 사고 경험이 뇌 기능을 떨어뜨린 것이다.
직접 사고를 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PTSD는 나타날 수 있다.
9.11테러 직후 미국신경정신과학회가 방송국에 협조공문을 보낸 적이 있다. 참사 장면을 자주 내보내지 말라는 요청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통해 수차례 그 장면을 본 뒤 심한 공포감과 우울증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느끼는 것. 이를 ‘간접적 PTSD’라고 한다.
국내에도 이런 사례는 있다. 이라크 테러단체에 의해 피살된 김선일 씨 사건이다. 당시 많은 국민이 이유 없이 화가 나고 아랍계 외국인만 봐도 두렵고 적개심이 일었다. 세상이 싫어지고 삶이 무기력해진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심한 경우 구토와 수면장애를 호소하기도 했다. 모두 간접적 PTSD의 증세다.
이번 비극이 앞으로 삶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주위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가 가장 중요하다.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좋은 추억만 얘기하자. 정신과 의사를 찾아 심리상담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있다. 시신이 바닷물에 떠다니는 장면이 여과 없이 방송화면에 나오는 것부터 줄여야 한다는 게 정신의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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