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서 중소 파이프제조업체를 경영하던 A 씨(53)는 부친에게 물려받아 20년 넘게 운영하던 회사 문을 지난해 5월 닫았다. 30여 명의 직원에게 미안해 2년 동안 고민을 하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경기 침체와 매출 감소, 어려운 회사 사정에도 계속되는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중국으로 떠나는 동료 기업인들, 기업인을 부도덕하다고 매도하는 사회적 분위기…. 계속 기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A 씨는 공장을 정리하고 남은 돈 60억여 원으로 서울 강남 지역에 5층짜리 건물을 사들여 현재 연간 수억 원의 임대료를 받고 있다.
대기업 차장 B 씨(41)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부인과 함께 양식당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근 퇴사(退社) 생각을 접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다.
“자영업에 나선 친구들은 최악의 경기 침체로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고, 명예퇴직으로 직장을 잃고 집에서 노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로자들을 끌어안고 가는 기업이야말로 ‘애국자’라는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습니다.”
극심한 불황과 내수 침체로 문을 닫는 기업이나 벼랑 끝에 몰린 기업이 늘고 있다. 이에 따라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 근로자들도 줄을 잇는다.
경제 전문가들은 ‘뉴 스타트’를 위한 경제 분야 과제로 ‘일자리의 원천인 기업 살리기’를 최우선적으로 꼽았다. 나랏돈으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려 봐야 일시적 효과만 있을 뿐이며 결국은 민간부문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소득 및 고용 증가의 근본 대책이라는 것이다.
○ 기업도 지배구조 투명성 높여야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많은 기업은 낙담했다. 대기업들이 그렇게 반대했지만 개정안은 정부 여당의 안(案)에서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제 전문가들은 “기업이 흔들리면 고용된 근로자들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며 “기업의 투자의욕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계 컨설팅회사인 맥킨지의 스테픈 베어 서울사무소 대표는 “한국 경기회복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내수침체를 극복하려면 일자리 창출을 통한 소득 창출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투자의욕 고취를 위한 기업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광선(鄭光善·경영학) 중앙대 교수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범위 내에서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높이는 등 기업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인 윤종훈(尹鍾薰) 회계사는 “기업은 주주들만의 것이 아니며 대주주, 종업원, 채권자, 주주 등 모든 이해관계의 집합체”라며 “기업을 오너만의 독점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종업원의 경영참여를 확대해 서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대기업-中企 기술협력 바람직
경기 하남시에서 가구제조업을 하는 유모 사장(34)은 지난해 수차례의 경영 위기를 넘기면서 근근이 한 해를 버텨 왔다.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작년 매출이 5억 원도 채 안 되는 등 회사 설립 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1년 창업 당시 18억 원이었던 연간 매출은 2002년 15억 원, 2003년 12억 원으로 해마다 급감하고 있다. 유 사장은 “지난해 하남에 있는 가구업체 가운데 부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기업이 수십 개에 이른다”면서 “그나마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올해는 중소기업이 더욱 어려운 환경에 놓일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정부와 대기업이 함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만우(李萬雨·경제학) 고려대 교수는 “수출 호조로 그나마 형편이 나은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끌어안아야 한다”며 “기술 지도도 해주고 대금 결제도 과거 관행에서 탈피해 현금으로 지급하는 등 중소기업에 실질적으로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 자영업 무너지면 실업대란
한국은 전체 취업자 대비 자영업자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높다.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전체 취업자(2280만 명) 3명 중 1명꼴인 767만여 명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전국의 자영업자 1506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 2003년 기준으로 4인 가족 월 최저생계비(101만 원)도 못 버는 자영업 가구주가 44.3%(668명)나 됐다.
송병락(宋丙洛·경제학)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영업자가 일터를 잃게 되면 딸린 식구들까지 한꺼번에 생계를 위협받게 된다”며 “소규모 영세 자영업자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언오(李彦五) 삼성경제연구소 전무는 “우리 사회는 법과 제도가 너무 복잡해 개인이 소규모 창업을 하기가 쉽지 않다”며 “좀 더 쉽게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고 아울러 이들의 비즈니스를 도와주는 ‘도우미 시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장경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낙오자’에게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두원(李斗遠·경제학) 연세대 교수는 “절대 빈곤층이 늘고 있다는 게 심각한 문제”라며 “정부는 공공 근로사업과 같은 일시적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민간부문이 이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김창원 기자 changkim@donga.com
▼‘고용의 量’ 대신 ‘고용의 質’ 챙겨야▼
“내년 최우선 과제는 고용이다.”(지난해 12월 17일 이헌재·李憲宰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민생은 ‘고용 없는 성장’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난해 12월 9일 박승·朴昇 한국은행 총재)
‘정부 경제팀’ 수장(首長)과 중앙은행 총재의 말처럼 고용은 올해 경제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키워드가 될 전망이다.
내수경기가 침체에 빠지고 성장률이 둔화되면서 고용 불안은 ‘가계소득 감소→소비 부진→설비투자 위축→일자리 감소’ 등의 악순환을 유발할 수 있는 ‘뇌관’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하는 인구에게 연간 40만∼50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11월 월평균 신규 일자리 수는 42만 개. 올해 연간으로는 평균 41만 개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치상으로는 정부의 목표를 근근이 달성한 셈이다.
2003년에 일자리가 3만개 정도 줄어든 것에 비교하면 통계상의 고용사정은 지난해 호전됐다. 하지만 고용의 질은 오히려 악화됐다.
노동부의 분석결과 지난해 8월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는 540만 명으로 1년 전보다 80만 명 정도 늘었다.
주당 36시간 미만의 불완전 취업자도 작년 1∼11월 255만500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의 239만7000명보다 15만8000명 증가했다.
특히 청년실업자(15∼29세)는 지난해 11월 현재 36만 명으로 전체 실업자(77만9000명)의 46%에 이르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올해 고용전망은 지난해보다 나쁘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재경부는 ‘40만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성장률 5% 성장’은 반드시 이룩해야 할 과제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민간경제연구소는 올해 성장률이 4% 안팎에 머물러 고용사정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와 함께 정부의 고용정책이 ‘질적인 변화’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특히 단기간의 재정지출을 통해 임시직을 늘리는 것은 실업률을 낮출 수는 있으나 생산성 저하와 노사분규의 원인이 되는 등 경제의 불안요인이 될 수 있다는 비판이 많다.
현대경제연구원 유병규(兪炳圭) 경제본부장은 “고용정책은 무엇보다 ‘제대로 된 일자리 창출’에 맞춰져야 한다”면서 “기업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투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게 우선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도움말 준 전문가들(가나다순)▼
▽경제 분야
김기원(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
김종석(홍익대 교수·경제학)
송병락(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안종석(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윤종훈(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회계사)
이두원(연세대 교수·경제학)
이만우(고려대 교수·경제학)
이언오(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정광선(중앙대 교수·경영학)
최흥식(한국금융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