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노사관계 기상도는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먹구름이 자욱하다는 표현이 오히려 정확할지도 모른다.
장기적인 내수 침체의 여파로 상당수 기업이 인력감축 등 구조조정에 나설 것이고 이에 따른 노사분규와 실업난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는 비정규직 관련 법안과 ‘산업공동화 대책’,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 방안’ 등 굵직한 이슈들을 놓고 연초부터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할 형편이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노사가 한 몸이라는 인식하에 가슴을 열지 않으면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 심각한 노사갈등까지 겹쳐 정말로 힘든 한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노사정 3자가 불신과 갈등의 구태를 벗어던지고 원탁에 둘러앉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먹구름 자욱한 안팎의 환경들=올해 고용시장은 지난해보다 더욱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압도적이다.
지난해 12월 27일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상장등록기업 507곳을 대상으로 ‘2005년 채용 전망’을 조사한 결과 ‘채용 계획이 없다’는 기업이 2003년 말 조사(9.2%) 때보다 2배 이상 늘어난 21.3%였다. 채용 규모도 13% 줄 것으로 예상됐다.
또 전문경영인 및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한국CEO포럼’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한국은행 예측(4.0%)보다 낮은 3.38%가 될 것이라며 경기 급강하를 우려하고 있다.
남성일(南盛日·경제학) 서강대 교수는 “경기가 나쁘면 후행지표인 실업률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올해는 경기불황의 여파로 실업률이 더 높아지고 산업공동화에 따른 기업의 구조조정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돼 노사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준모(趙俊模·경제학) 숭실대 교수는 “작년엔 민주노총 내 온건파가 득세하면서 불법파업이 줄고 평균 임금인상률도 2000년 이래 가장 낮았다”며 “그러나 올해는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 등 첨예한 현안이 많아 어느 때보다 시끄러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기로에 선 노사정 관계=민주노총은 20일 대의원대회를 열어 노사정위원회의 개편을 전제로 한 사회적 대화기구에 참여할지를 최종 결정한다.
최영기(崔榮起) 노동연구원장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여 여부가 올 한 해 노사관계의 향방을 가늠할 최대 변수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처리 여부도 노사관계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유선(金裕善) 노동사회연구소장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비정규직 관련 법안이 2월 국회에서 그대로 통과되면 노사정위는 무용지물이 되고 노-정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이상 노동계와 참여정부 간의 타협이 어려워진다는 것.
이에 따라 민주노총이 국회의 비정규직 관련 법안의 처리 유보를 전제로 조건부로 노사정위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해법은 대화뿐이다=노동문제 전문가들은 각자의 이념적 성향이나 친(親)경영, 친노동 등의 경향성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노사정이 다시 모여 앉아 상생을 위한 타협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병훈(李秉勳·사회학) 중앙대 교수는 “경제 불황과 빈부 양극화 같은 지금의 위기 앞에서 노사정은 소모적인 갈등 관행에 종지부를 찍고 1998년과 같은 대타협을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노동계에 대해서는 사회적 대화기구로의 복귀와 비정규직 포용을, 정부에는 비정규직 법안 등 첨예한 현안들을 시기에 구애받지 말고 단계적으로 처리함으로써 현안별 타협을 모색하는 전략을 요구했다.
그는 또 “경영계가 근로자를 파트너로 대하지 않고 마지못해 임금교섭을 벌이는 식의 행태가 노조의 전투주의나 불신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사용자 측의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물론 현안들에 대한 노사 간의 견해차는 여전히 큰 게 현실이다.
민주노총 김태현(金太炫) 정책기획실장은 “비정규직 법안은 완전히 재검토해야 한다. 국회가 정부 법안을 강행 처리할 경우 노-정 관계는 극단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최재황(崔載滉) 한국경영자총협회 정책본부장은 “법안 자체를 부정하는 식의 노동계 접근은 잘못됐다. 법안 수정은 필요하지만 국회 심의를 통해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지난해 노동계의 투쟁환경이 급변했다는 점에서 올해가 노동운동의 새 패러다임을 정착시키는 원년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공무원노조와 LG칼텍스정유 등의 불법 파업이 여론의 뭇매를 맞아 실패로 끝났으며 노동운동계 내부에서도 대기업 정규직 노조 중심의 과격한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잇달아 나왔다.
지난해 12월 20일 발표된 ‘한국노총 조합원 의식조사 보고서’에서 응답자의 45.9%가 ‘평화적인 노동운동’을 지지한 반면 ‘전투적 운동방식’을 요구한 대답은 10.9%에 불과했던 점도 시사적이다.
조준모 교수는 “노동운동은 순수성을 지키되 국민의 지지를 받고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며 “사용자 측도 합리적 노동운동이 설자리를 잃을 경우 과격세력이 빈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노조와 상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노사정위 ‘뉴스타트’할까▼
올해 노사 관계가 유달리 험난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노사정 대표들의 공식 대화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정상화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1998년 1월 외환위기 극복을 목표로 대통령직속자문기구로 출범한 노사정위는 출범 한 달 만에 90개 항으로 이뤄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체결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정부와 기업의 대규모 구조조정에 반발해 1년 만에 탈퇴함으로써 한국노총만 남아 ‘반쪽 기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사정위는 지난 7년간 ‘복수노조 설립, 노조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 시행 5년간 유예 합의’ ‘근로시간 단축 공익안 마련’(2001년), ‘고속도로관리공단 등 6개 공기업의 구조조정에 관한 노사합의 도출’(2002년),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 체결’(2004년 2월) 등 가시적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빠져 있다는 한계에다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에서 보듯 합의내용이 정작 산업현장에서는 별 실효가 없는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말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5년 만에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가 지난해 6월부터 열리기 시작해 노사정위 개편 방안을 논의했으나 △노사정위 성격 △논의 의제 △명칭 △참여 주체 △업종별 협의구성 등 5대 핵심 쟁점만 정한 상태에서 지난해 7월 논의가 중단됐다.
당시 지하철노조와 LG칼텍스정유에 대한 노동위원회의 직권중재가 잇따르자 민주노총이 대표자회의를 거부하고 노사정위 가입 여부 결정도 2005년 1월로 미뤘기 때문.
전문가들은 일단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복귀하고 이를 토대로 노사정위원회에서 한발 더 나아간 새로운 대화기구가 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의 성격과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린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지역별 산업별로 중층화된 협의구조가 필요하고 또 지금처럼 양대 노총만 노동계 대표로 나오지 말고 비정규직과 여성계층의 대표들도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일 서강대 교수는 “노사정위는 합의제가 아닌 협의체로서 근로조건에 관한 법과 제도 개선 등 노사관계 논의에 그 기능을 한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도움말 준 전문가(가나다순)▼
▽노동 분야
김성중(서울지방노동위원장)
김원배(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
김유선(노동사회연구소장)
김태현(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남성일(서강대 교수·경제학)
이기권(노동부 노사정책국장)
이병훈(중앙대 교수·사회학)
조준모(숭실대 교수·경제학)
최영기(노동연구원장)
최재황(한국경영자총협회 정책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