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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五.밀물과 썰물

입력 | 2005-01-05 17:52:00

그림 박순철


“이놈 유계(劉季)야. 잘 만났다. 너는 패현(沛縣) 저잣거리를 떠돌던 허풍장이 건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왕 노릇까지 하였지만, 이젠 네놈 악운(惡運)도 다했다. 여기서 나를 만났으니 아예 살아갈 생각을 말아라!”

옹치가 그렇게 소리쳐 꾸짖어 놓고 다시 저희 편을 돌아보며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잘 보아 두어라. 저기 저 구렁말 위에 앉은 수염 길고 허우대 멀쑥한 자가 바로 한왕 유방이다. 우리 패왕께서 저자의 목에 천금의 재물과 만호후(萬戶侯)의 벼슬을 거셨으니 모든 장졸들은 절로 굴러든 복을 놓치지 말라!”

이 말에 마주선 초나라 장졸들의 눈길이 일시에 한왕에게 쏠렸다. 옹치가 다시 무언가 그들을 충동질하며 스스로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박차 달려나왔다. 노관이 그런 옹치를 맞으러 말을 달려나가며 소리쳤다.

“대왕,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어서 피하십시오!”

그 말에 쫓기듯 한왕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앞을 적이 가로막고 있으니 달리 달아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한 군데 비어 있던 북쪽으로 달아나다 그쪽이 가로막힌 터라 사방 빠져 나갈 데가 없었다. 서쪽은 수수(휴水)로 막혀 있고, 남쪽은 방금 어렵게 빠져 나온 영벽의 싸움터였으며, 동쪽에는 팽성과 서초(西楚)의 염통 같은 땅이 펼쳐 있었다.

거기다가 더욱 한왕을 아뜩하게 한 것은 동남 양쪽에서 자우룩하게 먼지가 일며 또 다른 초나라 군사들이 그리로 몰려들고 있는 일이었다. 한군 10여만을 수수에 몰아넣어 죽이고도 성에 안 찼는지, 패왕이 전군을 풀어 겨우 달아난 한군 몇만을 끝까지 뒤쫓게 한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뿌리를 뽑아버릴 작정인 듯했다.

다급해진 한왕은 당장 눈앞이 비어 있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수수의 시퍼런 물결이 가로막아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돌아서는데 어느새 따라온 초나라 대군이 세겹 네겹으로 에워쌌다.

“여기서 이 유(劉)아무개도 끝인가. 교룡(蛟龍)의 씨, 적제(赤帝)의 아들이란 것도 지어내서 퍼뜨린 한낱 허황된 거짓말로만 세상을 떠돌다가 잊혀지고 말 것인가. 아득한 푸른 하늘 (悠悠蒼天)아, 나를 지어낸 뜻이 겨우 이것이었더란 말이냐?”

한왕이 문득 그렇게 탄식하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그때 실로 괴이쩍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서북쪽으로부터 크게 바람이 일더니 나무를 꺾고 돌과 모래를 날렸다. 그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바위와 통나무를 굴리고 멀리 보이는 농가도 지붕째 들어올렸다가 이웃 마당에 내동댕이칠 정도였다.

괴이쩍고 놀라운 일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멀쩡하던 하늘이 문득 어두컴컴해지더니 대낮인데도 그믐밤처럼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거기다가 바람은 서북쪽에서 불어온 것이라, 나르는 돌과 먼지뿐만 아니라 구르는 바위와 통나무가 모두 초나라 군사들 쪽으로만 쏟아졌다.

그러자 한왕을 에워싸고 있던 초나라 사졸들은 겁먹고 놀란 나머지 넋은 빠져 하늘을 날고 얼은 사방으로 흩어진(魂飛魄散) 듯했다. 한군은 화살 한대 날리지 않았는데도 크게 어지러워졌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