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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알렉산더’가 지루한 까닭

입력 | 2005-01-05 17:59:00


《지난해 12월 30일 개봉해 나흘 만에 전국 80만 관객을 끌어들인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 러닝타임 2시간 50분인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은 십중팔구 “대단하다. 그러나 지루하다”였다. 이는 ‘알렉산더’가 지난해 인기를 끈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와는 무척 다른 리듬과 설정, 서사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배신하고 있기도 하다. ‘알렉산더’가 지루한 이유를 지루하지 않게 벗겨봤다.》

○ 목석(木石) 같은 내레이션

알렉산더의 동료이자 부하인 ‘톨레미’(앤터니 홉킨스)의 회상 형식을 통해 진행되는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국정교과서에 필적하는 상투적 설명을 보여준다. “그는 신에 가까웠어.” “그는 군주의 강력한 통치력의 필요성을 인식시켰으며…헬레니즘을 온 세상에 전파했어.” “그는 정복지에 화평책을 썼지만 일부지역에선 적에게 일벌백계의 본을 보였지.” 인물에 대한 움직이는 설명 없이 찬양일색인 내레이션은 알렉산더를 재해석한다는 감독의 의도를 무색케 했다.

○ 관능적인 척, 자존심 센 척, 졸리… 졸리…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로 출연한 앤젤리나 졸리는 늘 그렇듯 딱 두 개의 표정만 보여준다. 누군가를 쳐다볼 땐 턱을 내려 관능적인 체하고(사진①),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볼 땐 턱을 올려 자존심 높은 척하는(사진 ②) 것. 온몸에 뱀을 칭칭 감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내민 모습에선 졸리만 보일 뿐 ‘알렉산더의 모친’은 간데없다. 이 영화에선 남편(필립 왕)에 대한 복수와 자신의 권력욕을 대리 실현할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복합감정이 요구되지만, 아들마저 ‘잠재적 애인’처럼 쳐다보는 졸리의 시선 처리는 이젠 장점이 아니라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됐다. 또 졸리는 마케도니아 순수 핏줄이 아니어서 고통 받는 왕비의 혈통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모든 ‘R’을 외국인인 양 풀어서 발음하는데, 관능미를 가장한 찐득찐득한 발음은 의도와는 반대로 불쾌지수를 높인다. “리멤버르 댓(Remember that·그걸 기억해)” “네버르(Never·절대로)” “포르기브 미(Forgive me·날 용서해라)” “유 아르 아 킹(You are a king·넌 왕이야)”. 아들 이름까지 “알레그젠더르!”하고 부른다.

○ 예쁜 여자는 어디에?

블록버스터에선 ‘약방의 감초’나 다름없는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알렉산더와 전우인 헤파이션간의 동성애로 대체됐다. 그러나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밀어(“네가 필요해, 헤파이션. 너밖에 없어” “폐하 앞에만 서면 저는 작아져요. 폐하를 잃을까 두려워요”)가 그러하듯, 동성애 묘사에는 구체성과 욕망의 꿈틀거림이 없다. 또 알렉산더가 결혼한 이민족 출신 왕비 ‘록산느’로 출연한 흑인배우 로사리오 도슨은 알렉산더의 취향은 몰라도 세계인의 미감(美感)을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다.

○ ‘할리우드 5분 법칙’ 깬 유장한 호흡

‘알렉산더’의 첫 전쟁장면은 40분이 지나서야 시작된다. 이는 시작 5분 안에 화끈한 볼거리를 배치한다는 블록버스터의 ‘5분 법칙’이 적용됐던 ‘트로이’와 다른 점. 5개의 전쟁 신을 균형 분포시켰던 ‘트로이’와 달리 이 영화는 단 두 번의 전쟁 신을 시작 40분과 종료 전 30분 지점에 배치했다. 첫 40분 간 장황한 역사 강의를 들어야 했던 관객은 다음 전쟁 신까지 다시 1시간 15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그래픽 참조). 이는 볼거리보다 알렉산더의 내면을 파고들어가는 전략을 세운 이 영화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