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한 9단은 대국 전날 잠을 설치는 편이다. 그는 “지난해 국수전 때는 ‘설렘’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최근엔 ‘부담감’ 때문에 잠을 설친다”고 말했다. 최 9단이 유리판 위에 바둑알을 놓는 모습을 아래에서 찍었다. 사진 제공 월간바둑
최철한 9단(崔哲瀚·20). 2003년 말 그는 5단에 타이틀도 없는 신예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천원전 국수전 기성전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특별 승단해 단숨에 입신(入神·9단의 별칭)의 경지에 올랐다.
단위만 오른 게 아니다. 그는 이제 이창호(李昌鎬) 이세돌 9단과 한국 바둑계를 짊어질 정상급 기사로 우뚝 솟았다.
그는 파괴력 있는 공격적 기풍으로 ‘독사’ ‘올인 보이’ 등 강렬한 느낌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러한 그가 ‘부드러운 별명을 갖고 싶다’고 말하자 한 인터넷 바둑사이트는 새 별명을 공모하기도 했다.
3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그를 만났다. 우선 10일 열릴 국수전 도전 1국이 화제가 됐다. 지난해 최 9단에게 2 대 3으로 진 이창호 9단이 도전자로 결정돼 리턴매치가 벌어지기 때문.
그는 선뜻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창호 형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지난 번 국수전엔 ‘한 수 배운다’는 마음가짐이었지만 올해는 ‘창호 형과의 승부를 즐기겠다’는 마음이 강해요. 팬들이 국수전 도전기를 새해 첫 빅 매치로 꼽는데, 지든 이기든 좋은 바둑을 선보이겠습니다.”
그는 또 3월에 중국의 창하오 9단과 우승상금 40만 달러(약 4억 원)의 잉씨배 결승 3∼5국을 둔다. 지난해 말 열린 1, 2국에서 1승 1패를 기록했다. 2국에선 어이없이 졌다.
“중반에 실수가 많았어요. 형세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는 바람에 무리수를 뒀고, 수읽기 실력을 자신하다가 상대의 역습에 판을 망치기도 했어요. 지난해 국수전에선 실수가 거의 없는 바둑을 두었는데….”
충만한 자신감을 적절히 다스리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대세를 보고 유연하게 두는 테크닉이 부족해요.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형세와 상관없이 패기 있게 두고 싶습니다. 형세가 유리하다고 안정을 추구하는 건 나이 스물에 이르잖아요.”
잉씨배 전망을 묻자 그는 “1 대 3으론 지고 싶진 않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옆을 지나다가 우연히 이 얘기를 들은 박승철 5단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5국까지 가면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거들자 그는 빙긋이 웃기만 한다.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가 넘어야 할 벽은 이창호 9단만이 아니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이세돌 9단도 있다. 최 9단은 최근 농심배 예선, 한국바둑리그 주장전에서 모두 이세돌 9단을 이겼다.
그는 “두 대국 모두 속기전이어서 진검승부는 아직 펼치지 못했어요. 세돌이 형은 영리한 바둑을 둬요. 공격하면서도 실리를 최대한 챙기죠. 신중하지 못하다는 약점만 빼면 최근 그의 실력이 업그레이드됐어요.”
그에게 바둑은 무엇일까. 일곱 살 때 바둑을 배워 10여 년간 바둑에만 빠져 살아왔다. 지난해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에 특기생으로 입학했지만 폭주하는 대국 일정 때문에 꿈꾸던 대학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잡으려고 욕심내면 점점 더 멀어지는 알 수 없는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 모르는 게 있는 세계 같아요. 뭘 알아야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제가 바둑을 선택한 게 아니라, 바둑이 저를 선택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운명이라고 느껴져요.”
그는 바둑계에도 기부문화가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어른스러운 말도 했다. 농구에선 3점슛당 1만 원, 축구에선 한 골당 10만 원씩 내듯이 바둑도 1승마다 10만 원씩 내는 기부 풍토가 조성됐으면 한다는 것.
그는 올해 목표로 ‘세계대회에서 국내 팬들에게 믿음을 주는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먼 목표는?
“전 기전을 휩쓸어야죠.”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최 9단, 2004 바둑대상 3관왕
최철한 9단이 2004 한국바둑대상에서 최우수 기사상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최 9단은 한국기원 주최로 6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한국바둑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기사상과 함께 다승상(61승) 연승상(16연승)도 받았다.
우수 기사상은 이창호 9단이, 감투상은 제1회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에서 우승한 김성룡(金成龍) 9단이 각각 받았다. 신예기사상은 박정상(朴正祥) 4단, 여자기사상은 조혜연(趙惠連) 5단, 아마추어 기사상은 서중휘(徐重輝) 아마 7단이 수상했다.
승률상은 이영구(李映九) 3단과 윤준상(尹畯相) 3단이 47승 15패(76%)로 공동 수상했고 인기상은 이창호 9단과 박지은(朴지恩) 5단이 탔다. 기록 부문을 제외한 바둑대상은 한국기원 출입기자단 26명이, 인기상은 누리꾼(네티즌)들이 투표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