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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보니/박정수]신용이 재산인 사회

입력 | 2005-01-06 18:36:00


10여 년 전 미국 스탠퍼드대 대학원으로 유학 온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다. 첫 학기 첫 시험 시간이었는데 학생들은 시험지 맨 앞장에 있는 윤리규정(honor code·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에 서명하고 교수는 시험지를 나눠 준 뒤 바로 강의실에서 사라졌다. 교실에는 조교나 다른 감독관도 없었고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만 남았다. 한편으로는 놀랐지만 “그래, 아마 대학원이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학부를 포함한 대학 전 과정, 전 과목에서 무감독 시험이 시행되고 있었다. 학생이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이상 학칙 상 감독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친 필자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서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대학 시절 강의실 책상이나 벽에 새까맣게 적혀 있던 ‘커닝용’ 낙서들이 떠올랐다. 시험 감독관이 자리를 옮기라고 했더니 학생이 책상까지 들고 옮기더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 않은가. 이처럼 한국에서는 부정행위에 대해 심각한 죄의식도 없을 뿐 아니라 훗날 즐거운 추억거리쯤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강하다.

물론 미국에서도 무감독 시험이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부정행위는 미국에서 큰 문제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이는 자율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정한 법과 원칙을 자율적으로 준수하고, 또 상대방이 준수할 것을 믿는 기대감. 교통질서, 세금정산, 쓰레기 분류 배출 등 어찌 보면 귀찮아 보이는 규칙이 시민의 자율적인 질서의식에 기초해 잘도 굴러간다. 누가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답답할 정도로 요령도 피우지 않고 원칙을 따른다.

어떻게 이런 삶의 태도가 보편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신용과 명예가 사회생활의 가장 큰 자산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일단 상대방을 믿어 주지만, 그 사람이 신용을 해치는 행위를 할 때에는 영영 회복하기 힘들 만큼 엄청난 사회적 실질적 비용을 부담 지운다. 법과 원칙을 어기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운영을 해치고, 선량하게 사는 이웃의 삶과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든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예외나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냉혹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회적 기대가 있기에 법과 원칙이 지켜지고, 조직이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부정행위가 적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 전해지는 대학수학능력시험 부정행위 사건 소식을 들으며 착잡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신용과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부끄러운 부정행위도 자연스럽게 사라지리라 기대해 본다.

박정수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