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에 국가 대전략(大戰略)이란 화두를 생각해 본다. 분단 60년인 올해도 한반도 통일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는다. 북한 핵문제와 한미 관계를 비롯한 대외정책의 주요 현안에서 국론은 여전히 분열되어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떠한 국가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전략은 있는지조차도 불분명하다.
그래서 생각나는 사람이 비스마르크다. 힘과 국가이익을 바탕으로 한 ‘현실정치(Realpolitik)’의 화신이 19세기 후반의 비스마르크였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열강 틈에서 독일통일을 이루고 제국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 바로 그였다.
21세기에 웬 비스마르크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지금 ‘신(新)비스마르크적 전략’이 절실하다. 비스마르크가 추구했던 제국이나, 그것을 위해 구사했던 ‘레알폴리티크’가 그 자체로 한국의 국가목표와 수단이 돼야 하는 가에는 의문이 있겠지만, 적어도 국가지도자가 국가의 미래를 담보할 대전략을 가슴에 품고 실현해 나가는 과정은 우리의 귀감이 돼도 좋다.
▼지역 小强國의 선택은▼
동북아에서 상대적 소국(小國)인 한국 앞에 놓인 전략적 선택 방안은 대체로 여섯 가지다. ①지역 헤게모니 국가 ②독자적 지역세력 ③동맹지향의 지역세력 ④동맹지향의 지역소국 ⑤편승하는 소국 ⑥고립주의적 국가 등이다. 미국은 이들을 뛰어넘는 세계적 헤게모니 국가다. 중국은 독자적 지역세력, 일본은 동맹지향의 지역세력이다. 한국은 동맹지향의 지역소국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미래 한국의 선택 방안은 무엇인가. 적어도 편승 국가나 고립주의적 국가는 아닐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지역세력으로서 동북아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는 이 지역에서 한국은 이러한 세력균형을 더욱 안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정도의 역할을 하는 국가여야 할 것이다. 현재보다는 강대한, 그러나 지역 헤게모니를 추구하지 않는 지역 소강국(小强國) 정도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안보 딜레마는 당장은 비전을 너무 크게 잡아서도 안 되고, 독자세력화는 실익(實益)이 없다는 데 있다. 비전을 너무 크게 잡으면 주변 국가의 사전 견제가 심하고 통일도 난망(難望)이다. 독자세력화는 강해지기는 어렵고 약해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립 소국이 되는 하책(下策)이다. 동맹이 없다면 ‘하드파워(hard power)’ 건설에 필요한 재원 공급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안보가 위협받을 때 보험도 없어지게 되며, 통일의 지원세력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동맹전략은 때로 국내 정치적으로는 인기가 없다. ‘자주’니 ‘민족’이니 하는 당의정 같은 개념의 유혹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동맹전략을 구사하는 지도자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 좋다고 국민에게 얘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 바로 ‘신비스마르크적 전략’의 지혜다.
북핵 문제는 이러한 전략을 테스트할 시금석이다. 그러나 한미 간에는 이미 상당한 시각차가 드러나고 있다. ‘한미 공조’라는 한 우산을 쓰고 있을 뿐 대북 강온노선, 남북정상회담, 대북지원, 북한 인권 등의 각론에서는 심각한 이견(異見)이 있다. 심지어 한국의 일각에서는 ‘북한보다 미국이 문제’라는 시각이, 미국에서는 한국의 핵 해결 의지에 대한 의구심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해결해야 할 대상은 저쪽에 두고 정작 한미가 서로 파열음을 내고 있는 것이다.
▼北核위기를 기회로▼
그러나 핵심은 한국에는 북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핵을 넘어서,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과 지역 소강국의 달성이라는 큰 그림이 지평선 너머 있다. 그러한 대업을 위해 무엇을 다져나가며, 무엇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북핵 같은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드는 것이 대전략의 백미다. 그러나 그러한 대전략적 견지에서의 레알폴리티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오늘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에게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현인택 객원논설위원·고려대 교수·국제정치학 ithyun@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