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은 국민에게 집단적 창조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을 심어 줌으로써 정치를 미학으로 변형시켰다. 1936년 로마 집무실 발코니에서 대규모 군중을 상대로 에티오피아전쟁 승리를 선언하는 무솔리니. 사진제공 교양인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로버트 C 팩스턴 지음 손명희·최희영 옮김/607쪽·2만7000원·교양인
파시즘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 서구 정치문화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 중 유일하게 뚜렷한 출생신고서를 갖고 있다. 1919년 3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세폴크로 광장에서 태어났다. 무솔리니를 필두로 퇴역 군인과 미래파 지식인 100여 명이 모여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부터였다.
파시즘은 사망신고서도 갖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수천 만 명의 전사자를 낳았던 나치즘의 광기가 종말을 고했다.
그러나 마치 천연두처럼, 지구상에서 깨끗이 사라진 줄 알았던 파시즘의 증세가 세계 도처에서 보고되고 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2위를 차지한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의 ‘국민연합’, 오스트리아의 제2정당으로 떠오른 하이더의 ‘자유당’,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당을 계승해 이탈리아 연정 파트너가 된 ‘국민연합’….
한국에서도 이런 증세가 자주 보고된다. 민족주의의 팽창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대중의 염증을 기반으로 반지성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노무현 정부를 두고 히틀러가 연상된다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군부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친북 좌파적 노무현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야말로 파시스트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이런 현상이 파시즘의 증세일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부의 지도 아래 있던 프랑스인들이 자발적이고도 광범위하게 나치정권에 협력했다는 점을 밝혀내 ‘팩스턴 이전의 비시와 팩스턴 이후의 비시’라는 말을 등장시킨 저자(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는 이 책을 통해 파시즘의 실체를 해부한다.
그는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파시즘의 최소치를 밝혀내는 방식으로 파시즘을 정의하는 방법에서 탈피했다. 대신 그 파시즘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최대치로 급진화’돼 갔는지를 추적하는 방식을 통해 그 본질을 밝혀내려 한다.
흔히 극우파로 이해되는 파시즘은 좌도 우도 아니고 더군다나 중도도 아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공격하는 좌충우돌의 사상이면서 중도를 경멸하는 철저한 부정(否定)의 사상이다. 또한 물질주의와 세속화를 비난하는 반근대적 반동이면서 최신 기술과 속도를 숭배하는 근대적 독재라는 이중성을 지녔다.
이는 파시즘이 원칙보다는 권력 쟁취, 그 자체를 중시하는 편의주의를 무기로 하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들에게는 일관성을 기대할 수 없다. 저자는 파시즘의 이러한 무질서성 때문에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전체주의라는 한 묶음으로 엮는 것에 반대한다.
파시즘은 또한 자유주의의 무능을 숙주로 삼고 사회주의에 대한 불안을 먹이로 삼는다. 또한 대중의 민족주의적 열광을 에너지로 삼는다. 따라서 일본 군국주의나 제3세계의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하기 이전의 체제라는 점에서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박정희 정부와 김일성 정권을 모두 대중의 동의에 기초한 독재체제라고 주장하는 ‘대중독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파시즘은 천연두가 아니라 당뇨병이다. 민주화를 성취해 정치적으로 배가 불러야 발병하는 질병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이후 저성장 고실업과 이념의 양극화로 체질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제 ‘The Anatomy of Fascism’(2004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