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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문중양]과학유물 복원 더 늦출수 없다

입력 | 2005-01-07 17:46:00


세종대왕이 다스리던 15세기 전반 조선 천문학의 수준은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고였다는 데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세종 때의 수준 높은 과학문화는 이후 성숙한 조선의 유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가장 큰 토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은 왜일까? 세종 때의 과학문화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경복궁도’를 보면 궁궐에서 펼쳐진 세종 때 과학문화 실상을 한눈에 잘 살펴 볼 수 있다. 경회루 북쪽의 궁궐 담 안쪽에 종합 관측소인 ‘간의대’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또 해와 별을 관측해서 낮과 밤의 시간을 헤아리던 조선 고유의 독창적인 시계인 일성정시의를 설치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일성의대’는 만춘전 옆쪽에 그려져 있다. 자동 물시계 ‘자격루’의 관리와 시보를 담당했던 ‘누국’과 천문역법을 담당하던 ‘관상감’ 건물이 경회루의 남쪽 궐내각사 지역에 보인다. 그야말로 경복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천문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이와 같은 세종 때의 경복궁에 있던 과학기구들과 부속 건물들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중에 많은 것들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한다 하더라도 원래의 위치에 있지 못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곳으로 쫓겨나 있거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도 않다.

예컨대 일성정시의는 현재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자격루는 중종 때의 것으로 그나마 중요한 기계장치 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물통 몇 개만 남아 있어 현존 유물이 정교한 기계장치로 작동되던 물시계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나마 부품 유물이 경복궁의 보루각을 떠나 덕수궁의 모퉁이에 박제처럼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다.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는 단 하나 남아 있으나 이는 세종 때의 것이 아니라 1837년 제작된 것이다. 하천 수위를 측정하던 ‘수표’ 또한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것이 남아 있다. 게다가 원래 수표교 앞쪽 청계천 바닥 한 가운데 있던 것이 지금은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으로, 수표는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헤어져 박제가 되어 있는 상태다.

20년 전부터 원로 과학사학자 한국외국어대 박성래 교수는 경복궁의 과학기구들과 부속 건물들을 복원해 살아 있는 과학문화의 공간으로 살리자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경복궁 복원 사업에서 과학유물 복원은 빠져 있다.

2008년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국립과학관이 과천에 세워질 예정이다. 물론 그 안에는 전통과학관도 있다. 원본이 거의 없는 우리 실정에서 대부분이 복원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 건물의 설계와 전시 시나리오는 확정 단계에 있으나, 전시될 유물의 확보와 복원에는 전혀 여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학계의 검증도 거치지 못한 유사품에 불과한 복제품들이 버젓이 전시될 것이 뻔하다.

15세기 전반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우리의 과학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과학유물의 복원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경복궁을 살아 있는 과학문화의 공간으로 살려야 함은 물론이고, 새 국립과학관에는 제대로 된 복원품을 전시해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늦었다. 과학유물의 복원 사업은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문중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