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도 가계경영 가르쳐요”가족 구성원이 재무 정보를 공유하는 등 가정에 투명경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권혁회, 홍혜경 씨 부부가 초등학생인 자녀에게 가정의 재무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고인(故人)의 빚을 일곱 살인 손자가 대신 갚으라.’ 회사원 이 모씨는 최근 법원에서 이런 판결을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억 원에 이르는 빚이 있다는 걸 알고 상속권을 포기했지만 이럴 경우 이 빚을 직계비속인 자신의 아들(아버지의 손자)이 자동 승계한다는 점을 몰랐던 것.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姜호中) 소장은 “부채 등 가정경제와 관련한 정보를 가족 구성원이 투명하게 공유하지 않을 경우 이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가정에 투명경영의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기업 투명성을 평가하는 잣대인 공시(公示), 회계, 지배구조 등과 관련한 기준을 가정경제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가족 구성원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지(공시) △가계부를 제때 정확히 결산하는지(회계) △대화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지(지배구조) 등을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보 공유가 투명경영 출발점=권혁회(權赫會·39), 홍혜경(洪惠璟·39) 씨 부부는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수현이(13)와 5학년인 아들 철환이(12)에게 가정경제와 관련한 정보를 선별 제공하고 있다. 부동산과 금융자산 보유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매달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지 등을 개략적으로 알려주는 것. 정확한 액수를 밝히지는 않는다.
권 씨는 “아파트 관리비와 전기료, 난방비 등 절약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비용은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강 소장은 “권 씨 부부처럼 자녀 연령에 따라 공개하는 정보의 수위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자녀가 초등학생이라면 가정 재무구조의 윤곽을 알려주는 정도가 적당하다.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는 자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부채 규모와 상환 계획, 보유자산 현황 등을 자녀의 이해능력에 따라 차례로 밝히는 게 좋다. 자녀가 성인이 되면 가족이 재무 정보의 대부분을 공유해야 한다. 부모의 은퇴 후 생활비를 감안한 저축과 투자를 가족이 함께 추진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어 자녀의 정보에 귀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이때 자녀가 회의를 주재하도록 해 가족회의가 부모의 일방적인 훈육시간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계부도 기업처럼 결산하라=가계부에 대한 검증이 수년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부실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홍 씨는 “수입 내 지출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사교육비가 예상보다 많이 늘어 정기적금을 해지하거나 휴가비용이 예산을 초과해 보유주식을 서둘러 팔기도 했다”고 전했다.
가정 재무설계 전문업체인 파이낸피아 임계희(任癸熙) 대표는 “금전출납부 수준인 현 가계부를 확 바꿔 일정 기간마다 결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각 가정은 연간, 반기, 분기별 예산을 짜야 한다. 예산 한도 내에서 지출하는 게 1차 목표.
이어 현금흐름표를 작성해야 한다. 현금흐름표의 내용은 △소득 △고정지출(대출 상환금 등) △변동지출(외식비 등) △저축 △투자 등 5가지. 매분기 결산해 실제 현금흐름이 예산과 일치하는지 따져보고 차이가 클 경우 예산이나 지출 관행을 바꿔야 한다.
숙명여대 계선자(桂仙子·가족자원경영학과) 교수는 “과거 자료를 쉽게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컴퓨터에 자료를 축적하는 ‘전자가계부’를 이용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가정경제는 전원합의체=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서 경매업을 하는 김상일(金相一) 씨는 가정의 중요 의사결정을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있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자주 생긴다. “작년 말 이사한 집이 어딘지 몰라 아내에게 전화로 물어봤어요. 새벽에 출근해서 오후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한다는 이유로 집안일을 모두 아내에게 일임하면서 생긴 해프닝이죠.”
한국여성개발원이 최근 기혼 여성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가정경제와 관련한 의사결정을 부부가 함께 하는 비율은 50.1%에 그쳤다. 수원대 최규련(崔圭蓮·아동가족복지학과) 교수는 “의사결정 과정에 가족 구성원을 참여시키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이 먼저 대화를 제의하고 시간을 따로 내는 게 중요하다. 결론을 섣불리 내는 건 금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해야 가족이 모두 합의하는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최 교수는 “강압적인 주장에 따라 중요한 문제가 결정되는 가정이라면 지배구조의 투명성에 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황재성 기자 jsonhng@donga.com
▼한국 가정경제 투명성 점수 100점 만점에 57점▼
한국 가정경제의 투명성 점수는 낙제점을 간신히 면한 57.1점인 것으로 나타났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는 최근 20∼50대 여성 105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결과 가정경제의 투명성 점수가 100점 만점에 57.1점으로 나타났다고 11일 밝혔다.
이번 설문조사 내용은 △정보의 공유 정도 △가계 지출과 수입의 결산 △비자금 규모 △의사결정 과정 △토론 과정 등 5가지였다. 신세계 유통산업연구소 노은정(盧垠靜) 소장은 “가정경제와 관련한 정보 공유와 결산 과정에 문제점이 노출된 반면 의사결정 방식은 과거에 비해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가정의 재무제표인 가계부를 제때 정확히 결산하는 가정도 드물었다. 가계부 결산 방식과 정확성과 관련한 평가 항목의 점수는 53.8점이었다. 가계부를 쓰는 가정은 많았지만 ‘수입 내 지출’이라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지출의 건전성을 따져보는 경우는 적었다. 특히 가계 부채와 투자 자산에 대한 관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반면 지배구조의 투명성은 높은 편이었다.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 가족 구성원이 토론하는 정도를 평가하는 항목에서 72.0점의 높은 점수가 나왔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