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충렬-김정일 박사 父子…東西洋철학 벽 허문다

입력 | 2005-01-11 18:00:00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왼쪽)와 아들 김정일 박사가 6일 김 교수의 35년 전 첫 저서 ‘시공여인생’을 제본한 책을 꺼내보며 환담하고 있다. 이 책의 원래 표지 한자 제목은 당시 다섯 살이었던 김 박사가 붓글씨로 쓴 것이다. 김미옥 기자


아버지는 불혹의 나이에 첫 저서로 ‘時空與人生(시공여인생·시공과 인생·Time, Space and Life)’을 냈다. 유불선(儒佛仙) 동양철학의 인식론을 비교하는 내용을 중국어로 쓴 책이었다. 그리고 30여 년 뒤 불혹을 맞은 아들은 ‘Time, Space and I’(시공과 나)를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번에는 동서양철학의 인식론을 비교분석한 영문 논문이다.

주인공은 김충렬 고려대 명예교수(74·동양철학)와 지난해 말 동국대 철학박사 학위 논문이 최종 심사를 통과한 김정일(金貞一·40) 박사 부자다. 김 박사의 논문 제목은 ‘Beyond the Closedness of Causality: A Comparative Study on Mind(인과성의 폐쇄성을 넘어서: 마음에 대한 동서철학 비교연구)’. 국내 철학박사 학위 논문으로는 드물게 영어로 쓰인 이 논문은 미국 실용주의철학의 창시자로만 알려진 찰스 샌더스 퍼스(1839∼1914)와 존 듀이(1859∼1952)의 사상에 끼친 동양철학의 영향을 분석하면서 서양철학의 인식론적 한계를 비판했다.

세대를 뛰어넘어 시공간의 개념을 들고 동서양철학의 경계를 허물어 가는 부자(父子) 철학자. 지난해 12월 중순 김 박사의 학위 논문이 통과된 뒤 그들을 만나기 위해 연락했지만 한자리에 서는 것을 한사코 꺼렸다. 아버지는 자식 자랑에 눈먼 아버지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류(亞流)로 비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랜 설득 끝에 결국 해를 넘겨 한자리에서 만난 그들은 키나 외모뿐 아니라 고집도 비슷했다.

그런 고집이 김 박사로 하여금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기까지 먼 길을 우회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른다. 김 박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철학에 대한 반발심리로 물리학을 택했고, 미국 캔자스주립대 유학 도중 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하지만 그가 택한 것은 논리를 중시하는 영미 분석철학이었다. 동양철학에 눈을 뜬 것은 “박사과정은 국내에서 밟으라”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 동국대로 돌아온 뒤였다.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정답을 추구하는 서양철학은 결국 그게 그 소리일 뿐’이라고 일갈한 적이 있어요. 동양철학은 정답을 주지는 않지만 뭔가 가르침을 준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이 갖고 있지 못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김 박사)

그는 국내 비교철학의 대가로 꼽히는 동국대 김용정 교수의 지도 아래 동서양의 인식론을 비교하는 논문을 준비했다. 그때 아버지가 제시한 인물이 존 듀이였다. 듀이는 중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중국철학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듀이와 그 스승인 퍼스는 동양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서양의 폐쇄적 인식론이 도달할 수 있는 확실성의 세계는 수많은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며 세계의 다중성을 주장했어요. 이런 주장은 서양철학사에서 신비론으로 취급받아 따돌림 당했지요.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 등 20세기의 수많은 과학적 발견은 오히려 퍼스와 듀이의 이론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김 박사)

그렇게 먼 길을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떨까.

“20세기에 서양이 동양에 뭔가를 가르쳐 줬다면, 21세기는 동양이 서양에 뭔가를 베풀어야 할 때입니다. 서양철학을 택한 아들이 그것을 깨달았다니 아비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 주길 바랄 뿐이지요.”(김 교수)

김 박사는 아버지 김 교수가 고려대에서 정년퇴임한 뒤 은거하고 있는 강원 원주시 문막에서 승마용 말을 키우며 자신의 철학을 벼리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